필사는 글쓰기 능력을 키우는 훌륭한 훈련법이다.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다양한 어휘를 익힐 수 있어 표현력과 문해력을 높여준다. 클립아트 코리아.
“책을 많이 읽어도 어휘력이나 문장력이 도통 늘지 않아요. 글쓰기 실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3월 고등학교 1학년에 진학하는 이석형 학생의 말이다. 그는 “국어와 언어영역 실력을 쌓고, 대입에서 논술 전형 응시를 염두하고 있어서 글을 빨리 잘 쓰고 싶다”며 “하지만 매번 똑같은 단어들만 사용하고, 단조로운 문장과 상투적인 표현이 고쳐지지 않아 불만”이라고 토로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청소년을 위한 필사 가이드>를 쓴 권정희 숭례문학당 강사는 ‘필사’를 추천한다. 그는 “필사가 글쓰기와 문장력 훈련에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다”며 “단순한 베껴쓰기를 넘어 자신의 생각과 해석을 넣어 단어와 문장을 바꿔쓰는 모방적 글쓰기가 글쓰기 효능감과 자신감을 높여준다는 사실은 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필사는 글쓰기 능력을 키우는 훌륭한 훈련법이다.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다양한 어휘를 익힐 수 있어 표현력과 문해력을 높여준다. 숭례문학당 권정희 강사 제공.
필사는 글을 베껴 쓰는 것을 말한다. 말 그대로 책 등을 보고 한 글자씩 옮겨 적는 단순한 행위일 뿐인데, 사람들은 왜 필사에 주목할까? 책을 정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쓰기 능력을 키우는 훌륭한 훈련법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다양한 어휘를 접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어 필사를 통해 표현력과 문해력까지 높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작가의 ‘사고의 흐름’에 따라 서술된 명문장을 베껴쓰는 과정에서 작가의 글쓰기 방식과 생각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며 “문체를 분석하고 다양한 표현을 모방하는 노력을 병행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다”고 말한다.
시인 윤동주를 비롯 소설가 조정래, 신경숙, 김영하 등이 필사로 실력을 키웠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권정희 강사는 “필사를 통해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글의 구조를 파악하고, 작가의 글쓰기 원리를 모방해보면서 완성된 글을 쓰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경험이 가능해진다”며 “이를 통해 글쓰는 속도가 빨라지고 글쓰기가 한결 수월해졌다는 효능감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필사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필사는 하루 10~15분 남짓, 하루 다섯 문장 쓰기면 충분하다. 게티이미지뱅크.
필사는 최고의 독서 훈련법이기도 하다. 필사는 읽는 행위와 손으로 글을 쓰는 행위가 함께 진행되기 때문에 속독이 통하지 않는다. 낱말의 뜻과 문장의 맥락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에서 자세히 읽는 정독 습관을 만들어준다. 권정희 강사는 “문장과 글에 시선을 오래 둔 채 관찰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자기 생각을 넣어 해석하는 사고력이 형성된다”며 “단순히 베껴쓰는 패러디 글쓰기가 아니라 단어와 문장을 바꿔보는 모방적 글쓰기를 추천한다”고 말했다.
필사는 예쁜 글씨체를 갖게 하고, 맞춤법을 교정하는 데 효과적이다. 박연숙(37) 씨는 “초등학교 4학년 아이의 글씨가 예쁘지 않고, 맞춤법과 띄어쓰기 등의 기초가 부족해 고민이 많았다”며 “필사를 시작한 뒤로 악필이 고쳐졌을 뿐 아니라 맞춤법 실력도 늘어 아이의 자존감이 한층 높아졌다”고 말했다.
필사는 집중력을 높이고 정서적 안정에도 도움을 준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초등학생 두 자녀와 집에서 매일 필사를 실천했다는 최선화(40)씨는 “덤벙대고 산만했던 아이들과 함께 매일 저녁 10분씩 책을 읽고 베껴썼다”며 “1년 남짓 한 결과, 책읽기 습관이 몸에 밴 것은 물론 집중력이 높아지고 사람을 배려하는 사려 깊은 아이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최씨 역시 글을 쓰는 행동에서 오는 편안함, 좋은 글귀로부터 얻는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고 만족해했다.
필사는 글쓰기 능력을 키우는 훌륭한 훈련법이다.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다양한 어휘를 익힐 수 있어 표현력과 문해력을 높여준다. 숭례문학당 권정희 강사 제공.
필사는 시작할 때는 자녀의 나이와 성별, 성격, 관심사, 평소 독서습관 등을 감안해야 한다. 일례로 지난해 말 광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1학년 학생에게 <명심보감> 필사를 시켜 아동학대 논란이 일었던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권정희 강사는 “아이의 나이와 인지능력에 맞춰 단계별로 필사를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글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분석할 수 있는 수준을 갖춘 초등학교 3학년 이후에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필사할 책 선정도 중요한데, 가장 훌륭한 선택지는 초·중·고 교과서의 발췌문이다. 아이의 연령 수준에 부합하고 주위에서 접하기 수월하며, 수많은 전문가들이 좋은 글이라고 선정했기 때문이다. 필사 대상을 국어, 문학 교과서로 국한하기보다는 역사, 도덕, 과학 등 다방면으로 확대하면 관련 지식까지 추가로 얻을 수 있다. 권 강사는 “교과서 발췌문에는 출처가 표기되는데, 해당 책 1권을 전부 베껴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려야 한다”며 “흥미와 재미를 바탕으로 좋은 문장만을 선별해서 써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필사는 하루 10~15분 남짓, 하루 다섯 문장 쓰기면 충분하다. 문장이 너무 길면 분석하기 어렵고, 너무 짧으면 맥락을 살피기 어렵다. 자녀의 수준을 고려해 싫증을 내거나 지루해하지 않는 수준이 적합하다. 환경에 관심이 있는 아이에겐 지구과학이나 생물 분야의 책을, 사회의 법과 제도에 관심이 많은 아이라면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도서를 선정하자.
자녀가 필사할 때는 손의 움직임뿐 아니라 내용을 곱씹으며 집중해서 쓰도록 알려줘야 한다. 문장의 마침표 등 문장부호와 띄어쓰기까지 정확하게 베껴쓰고, 필사 뒤에는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읽고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을 갖도록 가르쳐야 효과가 높다.
자녀가 필사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면 다양한 명문 구조에 자신의 생각을 담는 ‘필사-작문’, 즉 모방적 글쓰기를 시도해볼 만하다. 문장에 괄호를 넣어 단어와 어절, 주어와 서술어를 다른 단어로 바꾸거나 문장과 문장을 바꾸는 방식이다. 더 나아가 원문 형식을 유지한 채 소재를 바꿔 자신만의 글을 쓰는 단계까지 도전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필사는 하루 10~15분 남짓, 하루 다섯 문장 쓰기면 충분하다. 게티이미지뱅크.
필사는 독서와 마찬가지로 부모와 가족이 함께 하는 것이 좋다. 권 강사는 “아이와 엄마가 함께 쓰되, 자녀가 쓴 글에 대해서는 평가보다는 칭찬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부모와 자녀가 필사를 하는 목적과 이유를 공감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자녀가 어휘력과 문장력을 높이고 싶어 한다면 예부터 내려오는 고전이나, <소나기> <톰 소여의 모험> <몽실 언니> <완득이> <두근두근 내 인생> 등 문학 필사를 추천한다. 문학 도서에는 작가의 생각과 감정, 느낌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최상의 어휘와 문체가 녹아 있어 유연한 글쓰기를 가능하게 해준다.
자녀가 비판적 시각과 논리력을 키우기를 원한다면 비문학 필사가 적합하다. <청소년을 위한 필사 가이드> 저자들은 <뭘 써요, 뭘 쓰라고요?> <과학자의 서재>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뉴스, 믿어도 될까?>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 <비숲> <자기만의 철학> 등을 추천했다. 이와 별개로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과 함께 생각을 쉽게 표현하는 방법과 간결하고 명쾌한 문장을 접하고 싶을 때는 신문 속 기사와 칼럼이 유용하다.
필사는 글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분석할 수 있는 수준을 갖춘 초등학교 3학년 이후에 시작하는 것이 좋다. 게티이미지뱅크.
자녀의 외국어 능력을 키우기 위한 방편으로 필사를 활용할 수도 있다. 영어, 일어, 중국어 등의 원서로 된 책을 베껴쓰는 과정에서 단어를 익히고, 그 단어의 적절한 이용법과 문장의 형식을 알게 돼 실력 향상에 도움울 준다. 초등학생이라면 긴 문장보다는 한두 문장으로 이뤄진 명언이나 속담이 적합하다. 최선화 씨는 “일주일에 한 번은 아이들과 함께 <어린 왕자> <노인과 바다> 등의 원서에서 쉬운 부분을 골라 썼더니, 영어에 대한 아이들의 거부감이 없어졌다”며 “수월하게 영어 단어와 문장을 암기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필사의 장점이 많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참조 <청소년을 위한 필사 가이드>, <필사 문장력 특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