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원(왼쪽), 김민영 자주스쿨 대표는 “어른들조차 로블록스, 제페토, 이프랜드, 게더타운 등이 무엇인지 모르는 현실인 만큼 메타버스 시대에 대비해 자녀는 물론 부모의 성교육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자주스쿨 제공
중학교 2학년 유소라(가명)양은 최근 한 메타버스 플랫폼에서 사이버 스토킹과 성희롱을 당했다. 한 남성의 아바타가 소라양의 아바타를 계속 쫓아오며 말을 걸었다. 소라양이 이를 계속 무시하자 욕설과 함께 성희롱성 발언을 퍼부은 것은 물론 의도적으로 신체를 접촉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김단비(가명)양은 메타버스를 기반으로 하는 게임에서 한 남성 아바타로부터 성적인 요구를 받았다.
제페토, 로블록스 등 메타버스 플랫폼에서 ‘아바타’를 대상으로 한 성폭력과 스토킹, 그루밍 등 디지털 성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온라인 및 가상 공간에서는 현실 세계와 달리 타인의 접근과 호의에 대한 거부감이 덜하다는 점을 악용하는 이들이 많고, 이런 점 때문에 아동·청소년이 성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높다.
이석원·김민영 자주스쿨 대표는 “최근 10년 간 의무적으로 성폭력 예방 교육을 진행한 결과 아이들이 성적 자기결정권, 성적 동의, 성폭력의 정의와 유형, 현실에서 해도 되는 성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하는 성 행동 등은 잘 알고 있지만 가상 공간에서 성교육은 보편화되어 있지 않다”며 “어른들조차 로블록스, 제페토, 이프랜드, 게더타운 등이 무엇인지 모르는 현실인 만큼 메타버스 시대에 대비해 자녀는 물론 부모의 성교육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메타버스가 보편화된 지금, 성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 10여년간의 성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지금 해야 늦지 않는 메타버스 성교육>과 <이제는 피할 수 없는 메타버스 성교육>을 연달아 펴낸 이석원·김민영 대표에게 가상 공간에서의 성교육 중요성과 구체적인 교육 방법을 들었다.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메타버스 플랫폼인 제페토는 2022년 3월 기준 이용자가 3억명을 돌파했다. 주 이용자는 미성년자와 여성이다. 2021년 1월 닐슨코리아 조사에 따르면 제페토 이용자 10명 중 7명은 미성년자이고, 그중 7~12세 이용자가 50.4%로 절반을 차지했다. 성별로 보면 남성 23%, 여성 77%로 여성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로블록스 이용자 현황도 제페토와 유사한데, 그만큼 미성년자가 디지털 성폭력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경찰청 치안정책연구소는 ‘치안 전망 2022’ 보고서에서 메타버스를 활용하는 10대 여성이 늘어남과 동시에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신종 성범죄가 증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대표가 자녀가 어릴 때부터 부모가 가상 공간에서의 성범죄에 관심을 갖고, 성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이 대표에 따르면, 가상 세계의 캐릭터를 자신과 동일시 여기는 자녀들은 아바타가 성희롱, 성폭력을 당하면 현실의 고통처럼 느끼고 큰 충격을 받지만 부모가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는 “많은 부모들이 디지털 성폭력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된 자녀들의 상담을 요청하면서 미리 성교육을 해주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며 “하루라도 빨리 부모가 아이들에게 제공할 성교육을 준비하고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아바타끼리의 성범죄가 현실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반응하는 부모도 존재한다. 이는 아이가 가상 공간에서 성폭력을 당해도 부모가 해결사 역할을 할 수 없음을 뜻한다. 또한 아이는 물론 상당수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2021년 서울시 여성정책관실에서 진행한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 대상 상담 분석 연구’에 따르면, 가해 청소년 91명 중 96%가 “자신의 행위가 디지털 성범죄 가해행위인지 몰랐다”고 답했다.
김 대표는 “지인 사진을 합성해서 인터넷에 올리는 지인능욕, 성추행, 스토킹, 불법촬영, 유사 성행위 유도 행위는 물론 n번방 방지법 시행 이후 불법촬영물을 봤거나 소지해서 수사받는 사례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며 “어른들이 솔선수범해서 가상 세계에서의 성범죄 현황, 유형과 특징 등을 이해한 뒤 아이를 안전한 방향으로 안내하는 성교육 코치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녀들은 가상 세계의 캐릭터를 자신과 동일시 여기므로 자신의 아바타가 성희롱, 성폭력을 당하면 현실의 고통처럼 느끼고 큰 충격을 받는다. 자녀가 어릴 때부터 부모가 가상 공간에서의 성범죄에 관심을 갖고, 성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다. 자주스쿨 제공
가정 내에서의 성교육은 어떻게 시작해야 효과적일까? 일상 속 대화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김 대표는 “부모가 성교육에 대한 부담감부터 떨쳐내야 하는데, 아이가 성에 대해 질문하거나 아이와 성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불편해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TV에 나온 스킨십 장면이나 성적 이미지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는 등 성 관련 대화에 익숙해지는 연습이 필요하다”며 “메타버스에서 뭐가 재미있는지, 뉴스에 나오는 메타버스 성범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빠는 이런 거 보는데 어떻게 생각해?’ 등을 툭툭 던지듯 물어보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할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이 대표는 하루 5분이라도 대화하는 습관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이를 통해 아이가 평소 컴퓨터로 뭘 하는지, 스마트폰으로 뭘 하는 게 재미있는지 같은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아이에 대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어느 정도 대화가 자연스러워졌다면 메타버스에 대한 아이의 경험과 생각을 들어주면서 성교육을 시작할 수 있다”며 “이렇게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비판적 사고와 디지털 리터리시 교육 등 건강하게 메타버스를 활용하고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아이가 찾아가도록 알려주면 된다”고 설명했다.
‘메타버스에서 만나는 사람이 현실 세계의 친구처럼 괜찮을까?’ ‘메타버스에서 선물을 주겠다고 다가오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아바타나 인공지능이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성에 관한 대화나 행동을 해도 되는 것일까?’ ‘메타버스에서의 정서적 교류와 충격이 현실에서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등의 질문까지 나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 대표와 김 대표는 “이렇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서 답하게 하는 방법이 메타인지 성교육”이라며 “이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신중히 행동하며, 문제가 생겼을 때 주도적으로 해결할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자녀가 디지털 콘텐츠를 제대로 이해하고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표현하는 비판적 사고, 성인지 감수성 훈련, 미디어 리터리시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추게 됐다면 △낯선 사람과 대화할 때 한 번 더 생각하기, △아는 사람이라도 사진과 영상 전송 또는 다운로드 하지 않기, △욕설·비하·혐오 표현 안 하기, △친구나 지인을 모욕하는 합성물 만들거나 게시하지 않기, △문제 발생시 부모에게 도움 요청하기 등 구체적인 규칙을 정해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성교육에서도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배려’와 ‘존중’이다. 이 대표는 “본질적으로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교육을 가장 먼저 해야 한다”며 “현실에서 인성 교육이 잘 되어 있으면 메타버스 내에서도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행동을 한다”고 말했다.
자녀와의 대화 시 겁을 주거나 윽박지르면 안 된다는 점도 유념하자. 자녀가 메타버스 플랫폼에서 성 착취를 당했다고 부모에게 알렸다면 심하게 혼내고 나무랄 것이 아니라 아이의 편이 되어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떤 상황인지 파악한 뒤 해결자 역할을 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 대표는 “혼난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나쁜 일을 당했을 때 ‘또 혼나겠지’ 하는 두려움에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한다”며 “부모는 언제든 자녀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한 부모는 ‘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해서 이 사달을 만들어?’ ‘너 정말 미친 거 아냐?’라고 자녀를 혼내고 스마트폰을 빼앗고 메타버스 계정을 탈퇴시켰다. 그 후 자녀는 부모와 대화를 하지 않고 방 안으로 꽁꽁 숨어버렸다”며 “도움이 필요했던 아이에게 부모가 2차 가해 행동을 하면서 아이가 더 큰 배신감과 수치심을 느낀 것인데, 이러한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현행법상 아바타 간 성행위나 성추행 등 메타버스 성폭력을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 부모가 모든 문제를 대처하고 해결하기엔 역부족이다. 김 대표는 “자녀가 디지털 성폭력을 당했을 때에는 혼자 전전긍긍하기보다 신고 가능 여부에서부터 전문가와 상의하면 덜 힘들다”며 “전문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면 증거 확보 및 유포 여부, 삭제 지원까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여성긴급전화 1366(사이버상담 : www.women1366.kr), 청소년 상담전화 1388, 지역별 청소년 성문화센터, 탁틴내일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d4u.stop.or.kr),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www.cyber-lion.com) 등이 있다.
김 대표는 “전국의 주민센터, 청소년상담복지센터, 사회복지관, 학교에 성교육을 요청하는 방법도 있다”며 “특히 학교는 성교육을 진행할 의무와 책임이 있고 교육부 지침도 있기 때문에 강의 개설을 요청할 수 있는데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학부모들이 먼저 학교와 지자체에 성교육 강의 개설을 요청해 적극 활용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자녀들은 가상 세계의 캐릭터를 자신과 동일시 여기므로 자신의 아바타가 성희롱, 성폭력을 당하면 현실의 고통처럼 느끼고 큰 충격을 받는다. 자녀가 어릴 때부터 부모가 가상 공간에서의 성범죄에 관심을 갖고, 성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다. 자주스쿨 제공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