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경쟁을 뚫고 외고에 입학하지만 입학한 뒤에 벌어지는 경쟁은 백배 천배 더 격렬하다. 지난 6일 서울의 한 외고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학생들이 정문을 나서고 있다. 김정효 기자hyopd@hani.co.kr
커버스토리/
외국어고 열풍 뒤 ‘가려진 그늘’
전국에 있는 29개 외국어고의 2008학년도 신입생 모집 합격자 발표가 시작됐다. 2008학년도 경기권 외고의 특별전형 경쟁률은 지난해 5.8대1에서 8.6대1로 올랐다. 과학고와 자사고, 국제고 등의 특목고 가운데 광범위한 인기를 끌고 있는 외고는 특목고 입시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 외고에 학부모의 기대가 큰 탓이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를 곧잘 배반하기도 한다.
“외고만 가면 모의고사 성적 잘 나오고 좋은 대학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성적이 계속 떨어졌어요. 오히려 외고 간 뒤 마음을 못잡고 성적이 떨어지는 친구들이 꽤 있어요.” 얼마전 외고에서 일반고로 전학한 박아무개(16)양의 말이다. 외고 입학 뒤에 겪을 수 있는 좌절과 실패의 경험에 대해 학부모와 학생들은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지난 6일 밤 10시가 넘은 서울의 한 외고 정문.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한 학생이 급하게 뛰어 나오더니 기다리고 있던 승합차에 탔다. 승합차 앞부분에 수학전문학원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뒤이어 나온 학생들도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다. 이 학교 ㅇ(17)양은 “집으로 가는 친구들보다 학원에 가는 친구들이 더 많다. 집에 가서도 거의 과외 수업을 한다”고 했다. ㅇ양 역시 이날에는 학교가 끝나는 대로 학원에 가 수업을 하고 1시쯤 집에 간다고 했다.
외고에서 벌어지는 경쟁은 외고에 들어가기보다 몇배나 더 치열하다. 당연히 사교육비 등 교육비의 부담은 늘어난다. 전문가들이 외고 진학을 놓고 고민하는 학부모들에게 경제적 능력을 고려하라고 충고하는 것은 냉정한 현실이다.
1~2등 하던 아이, 외고가니 꼴찌 충격
경쟁 치열…전학·자퇴, 일반고의 4배나
외국어 특기는 뒷전 ‘입시학원화’ 현실 경제적 부담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외고에 들어가 대개의 학부모와 학생들은 ’석차’를 놓고 충격을 경험한다. 서울 ㅁ외고의 한 교사는 “상위 1% 안에 들던 아이들이 첫 시험을 보고 중하위권으로 떨어진 성적표를 받아드는 건 생각보다 굉장한 충격이다”고 했다. 서울 목동의 한 학부모는 "중학교 때는 열 손가락 안에 들었는데, 외고 가서 첫 시험을 보고 반에서 꼴찌에서 2~3등의 성적을 받고는 아이가 이불을 뒤집어 쓰는 울었다"며 "모의고사 성적은 그런대로 나오지만, 일년에 4번 학교 시험 때마다 치열한 석차 경쟁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이 학부모는 2008학년도 대입 결과를 보고, 앞으로 내신 비중이 높아진다면 일반고 전학도 고려하겠다고 했다. 성적에 자신감을 잃으면 아이들은 혼란을 겪는다. 학생들이 전학이나 자퇴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회 교육위 유기홍 의원(대통합민주신당)이 낸 자료를 보면 지난해 전학과 자퇴 등의 이유로 학교를 떠난 외고생의 비율은 3.4%로 일반고(0.8%) 보다 4배 많았다. 한 지방외고는 150명이었던 정원이 지금 110명 밖에 안 남았다. 경기권 외고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준비 중인 ㅂ(16)군은 “모두 명문대를 지망하는 친구들이라 수능도 내신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그런 분위기에서 내신 성적이 안 나오는 걸 보고 타격이 정말 컸다”며 “결국 내가 원하는 대학에 못가겠구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고 했다. 외고에 다니는 아이들의 긴장감은 상상 이상이다. ㅇ양은 “시험 때는 밥도 안먹고 공부하는 친구들도 있다”며 “배즙, 포도즙은 기본이고 총명탕과 녹용 등 보약 먹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경기권 외고에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하는 ㅂ양은 “시험 때가 되면 기숙사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갑다”고 했다. 이러다 보니 학교 분위기 자체가 ‘명문대 진학을 위한 입시 학원’으로 바뀌기도 한다. 경기권 외고에 다니는 ㄱ(17)양은 “외교 분야를 전공하는 데 외국어 공부가 도움이 될까해서 진학했는데 막상 와보니까 그야말로 ‘입시학원’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외고 입학 뒤 토플 점수가 20~30점 가량 떨어졌다. “학교에서 토플을 공부하지만 독해와 듣기 위주 수업이라 말하기와 쓰기 부분에서 점수가 안나온다”고 했다. 몇몇 외고에서는 유학을 준비하거나 외국 체류 경험이 있는 학생이 아니면 교사가 외국어 공부를 말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부산에 있는 한 외고에서 독어 전공을 하는 ㅎ양은 독어 관련 공인시험을 준비하려다 포기했다. 교사가 ‘그 시간에 수능시험 한 문제라도 더 풀라’고 만류했기 때문이다. ㅎ양은 “국내 대학을 갈 학생들은 외국어 특기를 키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경남권의 외고에 다니는 ㅅ(16)양은 “중국어 특기자로 국제학부나 중문과에 가려고 외고에 들어왔는데, 학교에서 하는 중국어 수업만으로는 졸업 자격인 ‘중국한어수평고시(HSK)’ 급수를 따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ㅅ양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외고에 들어가 중국어를 공부할 요량으로 준비를 해왔는데, 막상 외고에 들어온 뒤에는 학원에서 한두달이면 배울 내용을 학교에서는 1년 동안 배워야 한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외국어를 익혀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는 꿈은 학교 밖에서 준비하거나, 혹은 대학 진학 이후로 밀어놓아야 하는 것이다. 흔히 학부모들은 외고만 들어가면 ’끝’인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시작’이나 마찬가지다. 경제적 부담, 치열한 경쟁 등을 감당할 수 없다면, 오히려 아이에게 잘못 꿴 첫단추가 될 수도 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1~2등 하던 아이, 외고가니 꼴찌 충격
경쟁 치열…전학·자퇴, 일반고의 4배나
외국어 특기는 뒷전 ‘입시학원화’ 현실 경제적 부담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외고에 들어가 대개의 학부모와 학생들은 ’석차’를 놓고 충격을 경험한다. 서울 ㅁ외고의 한 교사는 “상위 1% 안에 들던 아이들이 첫 시험을 보고 중하위권으로 떨어진 성적표를 받아드는 건 생각보다 굉장한 충격이다”고 했다. 서울 목동의 한 학부모는 "중학교 때는 열 손가락 안에 들었는데, 외고 가서 첫 시험을 보고 반에서 꼴찌에서 2~3등의 성적을 받고는 아이가 이불을 뒤집어 쓰는 울었다"며 "모의고사 성적은 그런대로 나오지만, 일년에 4번 학교 시험 때마다 치열한 석차 경쟁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이 학부모는 2008학년도 대입 결과를 보고, 앞으로 내신 비중이 높아진다면 일반고 전학도 고려하겠다고 했다. 성적에 자신감을 잃으면 아이들은 혼란을 겪는다. 학생들이 전학이나 자퇴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회 교육위 유기홍 의원(대통합민주신당)이 낸 자료를 보면 지난해 전학과 자퇴 등의 이유로 학교를 떠난 외고생의 비율은 3.4%로 일반고(0.8%) 보다 4배 많았다. 한 지방외고는 150명이었던 정원이 지금 110명 밖에 안 남았다. 경기권 외고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준비 중인 ㅂ(16)군은 “모두 명문대를 지망하는 친구들이라 수능도 내신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그런 분위기에서 내신 성적이 안 나오는 걸 보고 타격이 정말 컸다”며 “결국 내가 원하는 대학에 못가겠구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고 했다. 외고에 다니는 아이들의 긴장감은 상상 이상이다. ㅇ양은 “시험 때는 밥도 안먹고 공부하는 친구들도 있다”며 “배즙, 포도즙은 기본이고 총명탕과 녹용 등 보약 먹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경기권 외고에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하는 ㅂ양은 “시험 때가 되면 기숙사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갑다”고 했다. 이러다 보니 학교 분위기 자체가 ‘명문대 진학을 위한 입시 학원’으로 바뀌기도 한다. 경기권 외고에 다니는 ㄱ(17)양은 “외교 분야를 전공하는 데 외국어 공부가 도움이 될까해서 진학했는데 막상 와보니까 그야말로 ‘입시학원’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외고 입학 뒤 토플 점수가 20~30점 가량 떨어졌다. “학교에서 토플을 공부하지만 독해와 듣기 위주 수업이라 말하기와 쓰기 부분에서 점수가 안나온다”고 했다. 몇몇 외고에서는 유학을 준비하거나 외국 체류 경험이 있는 학생이 아니면 교사가 외국어 공부를 말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부산에 있는 한 외고에서 독어 전공을 하는 ㅎ양은 독어 관련 공인시험을 준비하려다 포기했다. 교사가 ‘그 시간에 수능시험 한 문제라도 더 풀라’고 만류했기 때문이다. ㅎ양은 “국내 대학을 갈 학생들은 외국어 특기를 키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경남권의 외고에 다니는 ㅅ(16)양은 “중국어 특기자로 국제학부나 중문과에 가려고 외고에 들어왔는데, 학교에서 하는 중국어 수업만으로는 졸업 자격인 ‘중국한어수평고시(HSK)’ 급수를 따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ㅅ양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외고에 들어가 중국어를 공부할 요량으로 준비를 해왔는데, 막상 외고에 들어온 뒤에는 학원에서 한두달이면 배울 내용을 학교에서는 1년 동안 배워야 한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외국어를 익혀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는 꿈은 학교 밖에서 준비하거나, 혹은 대학 진학 이후로 밀어놓아야 하는 것이다. 흔히 학부모들은 외고만 들어가면 ’끝’인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시작’이나 마찬가지다. 경제적 부담, 치열한 경쟁 등을 감당할 수 없다면, 오히려 아이에게 잘못 꿴 첫단추가 될 수도 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