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목별 논술교과서 / [난이도 수준-중2~고1]
논점 2. 역사 서술에 대한 비판적 접근
■ 교과서 읽기
후삼국의 성립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중략)
궁예는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처음에는 북원(원주) 지방의 도적 집단을 토대로 강원도, 경기도 일대의 중부 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예성강 유역의 황해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는 세력이 커지자,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독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웠다(901). 그 후 궁예는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 기반을 다져,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태봉으로 바꾸고,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였다. 궁예는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고 골품 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신분 제도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계속되는 전쟁을 치르려고 지나치게 조세를 거두어들였고, 죄 없는 관료와 장군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전제 정치를 도모하였다. 이에 따라 백성과 신하들의 신망을 잃어 신하들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고등학교 <국사>, 교육인적자원부
■ 교과 심화 궁예 [弓裔, 선종]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궁녀이나 이름은 알지 못한다. 혹은 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 전해지기도 한다. 왕실에서 버림받고 유모의 손에서 자라다가 세달사(世達寺)에 들어가 중이 되어 선종(善宗)이라 이름했다. 당시의 신라 왕실은 극도로 쇠약해져,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일어났다. 국고가 바닥이 나 889년(진성여왕 3)에 과도하게 세금을 독촉하자 전국적으로 백성들의 항쟁이 심해지고 초적(草賊)이 발생했다.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기훤(箕萱)과 양길(梁吉)이 있었는데,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이듬해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궁예는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酒泉, 예천)·내성(奈城, 영월)·울오(鬱烏, 평창)·어진(御珍, 울진)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했다. 894년에는 양길과 결별하고 장군을 자처하며 독자적 세력을 이루었다. 896년경 송악(松嶽, 개성)의 왕건(王建) 부자가 투항을 했다. 898년 평안도와 한산주(漢山州)의 30여 성을 공략하는 한편, 양길군을 격파했다. 899년(효공왕 3) 왕건을 시켜 양주(楊州)·견주(見州)를 복속케 하고, 이듬해에는 광주·춘주(春州)·당성(塘城, 화성시 남양)·청주(靑州)·괴양(槐壤, 괴산)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 전체를 지배했다.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라 했다. (중략) <고려사>는 왕이 된 뒤 궁예의 행적을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왕건의 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궁예를 폭군으로 기술하고, 고려 500년을 거치면서 그에 대한 평가절하가 이루어진 까닭이다. 궁예는 신라의 멸망을 촉진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워 왕권 강화를 시도하는 등의 정치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호족 세력의 포섭에 실패하고 신라 말의 상황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사회 모순에 대한 개혁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완전한 국가 체제를 갖추기 전에 제거되었다. - 브리태니커 백과
■ 논제 해결 객관적 기술 위해 필요한 것은? 아래의 <제시문>과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문제를 요약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서술하시오.(600~700자 안팎, 성균관대 기출문제 변형) <제시문> 왕건이 궁예의 여러 장수들 중 하나로서 궁예의 은총을 받아 대병(大兵)을 맡게 되자, 드디어 궁예를 쫓아내어 객사(客死)하게 하고 또한 ‘이신시군’(以臣弑君)의 죄를 싫어하여 전력을 기울여 궁예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죄를 만들어 냈다. 고려의 사관(史官)은 ‘궁예는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자식인데, 왕은 그의 생일이 5월 5일임을 미워하여 내다 버렸다. 궁예가 이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하였는데 그는 어느 절에서 벽에 그려져 있는 헌안왕의 초상화까지 칼로 쳤다.’고 하였다. 그러고는 더욱 확실한 증거를 만들기 위하여, ‘궁예가 태어난 뒤에 헌안왕이 엄히 명령을 내려 궁예를 죽이라고 하였는데 궁녀가 누대 위에서 아래로 궁예를 던지니, 아래에서 유모가 받다가 그만 잘못하여 손가락이 그의 한쪽 눈을 찔러 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유모가 비밀히 그를 길러냈는데 그가 10여 세가 되어 장난이 심하였다. 이에 그 유모가 울면서 “왕이 너를 버리신 것을 내가 차마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몰래 길렀는데 이제 네가 미친듯이 멋대로 행동함이 이와 같으니 만일 남이 알면 너와 나는 다 죽을 것이다.”고 하니, 궁예가 듣고 울며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 만약 사관의 말이 맞는다면, 궁예가 비록 헌안왕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그가 태어난 날 누대 위에서 죽으라고 던진 날부터 이미 부(父)라는 명의(名義)가 끊어진 것이니, 궁예가 헌안왕의 몸에 직접 칼질을 하더라도 시부(殺夫)의 죄가 될 수 없고, 신라 왕의 능(陵)과 도읍을 유린하더라도 조상들을 욕보인 죄를 논할 수 없을 터인데, 하물며 왕의 초상화를 치고 문란한 신라를 혁명하려고 한 것이 무슨 큰 죄나 논란거리가 되겠는가. 그렇지만 고대의 좁은 윤리관으로는 그 두 가지 일 ─ 헌안왕의 초상화를 칼로 친 일과 신라에 대한 불공(不恭) ─ 만으로도 궁예에게는 죽어도 남을 죄가 있는 것이니, 죽어도 죄가 남을 궁예를 죽이지 못할 게 무엇이랴. 이리하여 왕건은 살아서 고려의 통치권을 가지고 죽어서 태조 문성의 시호를 받았더라도 추호도 부끄러울 게 없게 된 것이니, 이것이 고려의 사관이 구태여 세달사(世達寺)의 일개걸승(乞僧)이던 궁예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황궁의 왕자를 만든 이유일 것으로 생각한다. <자료> 아래는 남한과 북한의 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들을 비교 분석하여 그 분포를 도표로 나타낸 것이다.
◎ 해결 방향 역사의 본성은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을 통해 진실을 규명하는 데 있다. 그러나 주어진 문헌이나 유적, 유물 등 사료의 제한성 때문에 역사가라는 전문 학자들의 의견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역사를 보는 관점인 사관(史觀)에 따라 해석의 상이성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 전문가들을 배제한 정치적인 논리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사건의 실체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문제의식으로 논제에 접근할 경우, 출제자의 요구 사항을 이해하는 데 유리하다. <제시문>는 <조선상고사> ‘총론’의 일부로서 <고려사>에 대한 비평이다. 신채호에 따르면 궁예는 원래 중에 불과한데, <고려사>에는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로서 불효불충한 자였다고 묘사돼 있다. 이를 통해 사관들은 왕건이 궁예를 배신한 행위(신하가 임금을 죽인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결국 신채호의 주장이 암시하는 바는 역사가 성공한 자의 편에서 쓰인다는 점, (유교적)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즉, 현실적 필요에 따라 역사를 완전히 왜곡, 날조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자료>는 남북한의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적 비중을 가진 인물들 중에 공통되는 인물의 비중이 18.6%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따라서 <제시문>과 <자료>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갈등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 기술 혹은 해석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구체적인 사례를 근거로 전개해나가는 능력이 필요하다.
■ 교과 심화 궁예 [弓裔, 선종]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궁녀이나 이름은 알지 못한다. 혹은 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 전해지기도 한다. 왕실에서 버림받고 유모의 손에서 자라다가 세달사(世達寺)에 들어가 중이 되어 선종(善宗)이라 이름했다. 당시의 신라 왕실은 극도로 쇠약해져,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일어났다. 국고가 바닥이 나 889년(진성여왕 3)에 과도하게 세금을 독촉하자 전국적으로 백성들의 항쟁이 심해지고 초적(草賊)이 발생했다.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기훤(箕萱)과 양길(梁吉)이 있었는데,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이듬해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궁예는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酒泉, 예천)·내성(奈城, 영월)·울오(鬱烏, 평창)·어진(御珍, 울진)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했다. 894년에는 양길과 결별하고 장군을 자처하며 독자적 세력을 이루었다. 896년경 송악(松嶽, 개성)의 왕건(王建) 부자가 투항을 했다. 898년 평안도와 한산주(漢山州)의 30여 성을 공략하는 한편, 양길군을 격파했다. 899년(효공왕 3) 왕건을 시켜 양주(楊州)·견주(見州)를 복속케 하고, 이듬해에는 광주·춘주(春州)·당성(塘城, 화성시 남양)·청주(靑州)·괴양(槐壤, 괴산)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 전체를 지배했다.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라 했다. (중략) <고려사>는 왕이 된 뒤 궁예의 행적을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왕건의 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궁예를 폭군으로 기술하고, 고려 500년을 거치면서 그에 대한 평가절하가 이루어진 까닭이다. 궁예는 신라의 멸망을 촉진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워 왕권 강화를 시도하는 등의 정치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호족 세력의 포섭에 실패하고 신라 말의 상황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사회 모순에 대한 개혁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완전한 국가 체제를 갖추기 전에 제거되었다. - 브리태니커 백과
■ 논제 해결 객관적 기술 위해 필요한 것은? 아래의 <제시문>과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문제를 요약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서술하시오.(600~700자 안팎, 성균관대 기출문제 변형) <제시문> 왕건이 궁예의 여러 장수들 중 하나로서 궁예의 은총을 받아 대병(大兵)을 맡게 되자, 드디어 궁예를 쫓아내어 객사(客死)하게 하고 또한 ‘이신시군’(以臣弑君)의 죄를 싫어하여 전력을 기울여 궁예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죄를 만들어 냈다. 고려의 사관(史官)은 ‘궁예는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자식인데, 왕은 그의 생일이 5월 5일임을 미워하여 내다 버렸다. 궁예가 이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하였는데 그는 어느 절에서 벽에 그려져 있는 헌안왕의 초상화까지 칼로 쳤다.’고 하였다. 그러고는 더욱 확실한 증거를 만들기 위하여, ‘궁예가 태어난 뒤에 헌안왕이 엄히 명령을 내려 궁예를 죽이라고 하였는데 궁녀가 누대 위에서 아래로 궁예를 던지니, 아래에서 유모가 받다가 그만 잘못하여 손가락이 그의 한쪽 눈을 찔러 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유모가 비밀히 그를 길러냈는데 그가 10여 세가 되어 장난이 심하였다. 이에 그 유모가 울면서 “왕이 너를 버리신 것을 내가 차마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몰래 길렀는데 이제 네가 미친듯이 멋대로 행동함이 이와 같으니 만일 남이 알면 너와 나는 다 죽을 것이다.”고 하니, 궁예가 듣고 울며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 만약 사관의 말이 맞는다면, 궁예가 비록 헌안왕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그가 태어난 날 누대 위에서 죽으라고 던진 날부터 이미 부(父)라는 명의(名義)가 끊어진 것이니, 궁예가 헌안왕의 몸에 직접 칼질을 하더라도 시부(殺夫)의 죄가 될 수 없고, 신라 왕의 능(陵)과 도읍을 유린하더라도 조상들을 욕보인 죄를 논할 수 없을 터인데, 하물며 왕의 초상화를 치고 문란한 신라를 혁명하려고 한 것이 무슨 큰 죄나 논란거리가 되겠는가. 그렇지만 고대의 좁은 윤리관으로는 그 두 가지 일 ─ 헌안왕의 초상화를 칼로 친 일과 신라에 대한 불공(不恭) ─ 만으로도 궁예에게는 죽어도 남을 죄가 있는 것이니, 죽어도 죄가 남을 궁예를 죽이지 못할 게 무엇이랴. 이리하여 왕건은 살아서 고려의 통치권을 가지고 죽어서 태조 문성의 시호를 받았더라도 추호도 부끄러울 게 없게 된 것이니, 이것이 고려의 사관이 구태여 세달사(世達寺)의 일개걸승(乞僧)이던 궁예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황궁의 왕자를 만든 이유일 것으로 생각한다. <자료> 아래는 남한과 북한의 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들을 비교 분석하여 그 분포를 도표로 나타낸 것이다.
◎ 해결 방향 역사의 본성은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을 통해 진실을 규명하는 데 있다. 그러나 주어진 문헌이나 유적, 유물 등 사료의 제한성 때문에 역사가라는 전문 학자들의 의견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역사를 보는 관점인 사관(史觀)에 따라 해석의 상이성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 전문가들을 배제한 정치적인 논리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사건의 실체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문제의식으로 논제에 접근할 경우, 출제자의 요구 사항을 이해하는 데 유리하다. <제시문>는 <조선상고사> ‘총론’의 일부로서 <고려사>에 대한 비평이다. 신채호에 따르면 궁예는 원래 중에 불과한데, <고려사>에는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로서 불효불충한 자였다고 묘사돼 있다. 이를 통해 사관들은 왕건이 궁예를 배신한 행위(신하가 임금을 죽인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결국 신채호의 주장이 암시하는 바는 역사가 성공한 자의 편에서 쓰인다는 점, (유교적)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즉, 현실적 필요에 따라 역사를 완전히 왜곡, 날조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자료>는 남북한의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적 비중을 가진 인물들 중에 공통되는 인물의 비중이 18.6%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따라서 <제시문>과 <자료>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갈등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 기술 혹은 해석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구체적인 사례를 근거로 전개해나가는 능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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