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고2~고3] 21. 천재의 조건- 노력일까, 재능일까
22. 왕자와 거지, 가난의 두 얼굴
23. 폭력과 비폭력, 과연 가슴은 주먹보다 힘이 셀까? 누군가의 마음을 휘어잡으려면 그 사람의 절실한 욕망을 알아내야 한다. 인간은 절절한 욕구 앞에는 쉽게 무릎을 꿇는 법이다. 돈이 아쉽다면 현금뭉치를, 권력에 굶주렸다면 높은 자리를, 애정에 목말랐다면 뜨거운 사랑을 약속하라. 그러면 상대방은 정신을 놓고 내가 시키는 대로 휘둘릴 테다. 하지만 욕심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 유혹하려 해도 방법이 없다. 아쉬워하는 것이 없는데 무엇으로 마음을 잡아끌겠는가. 옛 현자들은 하나같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라고 했다. 세상을 제대로 보고 올곧게 이끌기 위해서는 내 마음속 불끈거리는 욕망부터 다스려야 한다. 노예였던 에픽테토스는 마음을 다잡을 줄 알았던 철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불행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아가 그 무엇으로도 에픽테토스에게 고통을 줄 수 없었다.
“훌륭한 말(馬)은 ‘나는 아름답다’고 우쭐거릴 수 있다. 하지만 그대는 ‘나는 아름다운 말을 가지고 있다’며 뽐내서는 안 된다. 말의 좋은 점에 대해 왜 당신이 으스대야 하는가?” 아무리 멋지고 좋은 것을 가졌다 해도, 그것은 ‘내’가 아니다. 큰 재산을 모으고 높은 지위를 누려도 언젠가는 내게서 떠나가 버릴 테다. 그래서 부자가 되고 명예가 높아질수록 마음속의 불안도 한껏 더 커진다. 에픽테토스는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하리라는 사람들의 ‘착각’을 제대로 꼬집는다. “‘나는 너보다 부자야. 그러니 내가 더 낫지.’ 이런 생각은 잘못되었다. ‘나는 너보다 부자야. 그러니 내 재산이 더 많아’라는 뜻일 뿐이다. ‘나는 너보다 더 말을 잘한다. 그래서 내가 더 낫다’는 믿음도 마찬가지다. 이 말 역시 ‘나는 너보다 말을 잘한다. 그러니 내 웅변이 더 낫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지로 인간됨이 좋고 나쁨을 가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좋은 차를 몰고 멋진 집에 살면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 때문에 마음만 더 초조해질 뿐이다. 높게 올라가면 떨어질 때 충격은 더 커진다. 부자일수록 탐욕스럽고, 지위가 높을수록 명예에 게걸스레 매달리게 되는 이유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충고한다. “무엇을 잃어버렸건 ‘내가 그것을 잃었다’고 하지 마라. ‘그것을 돌려주었다’고 말하라. 마누라가 죽었는가? 되돌려주었을 뿐이다. 땅을 빼앗겼느냐? 이 또한 되돌려주었을 따름이다. 나그네가 여관에 잠시 머물듯, 그대는 원래 그대 소유가 아닌 것을 잠시 누렸을 뿐이다.” 나아가 에픽테토스는 실패와 좌절마저도 마음을 추스르는 연습 기회로 삼으라고 가르친다. “올리브기름을 쏟고 포도주를 도둑맞았을 때, 이렇게 되뇌도록 하라. ‘나는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값을 치렀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 어린아이는 사탕을 뺏기면 세상이 끝난 것처럼 화를 터뜨린다. 어른은 사탕 정도는 가볍게 웃으며 내주곤 한다. 이처럼 성숙이란 욕심에서 자유로워지는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욕심을 더욱 키우고 능력껏 채우라고 부추긴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야망이 큰 사람’으로 되레 칭찬을 듣곤 한다. 사람들은 인격을 잘 가다듬은 사람보다 큰 재산과 명예를 차지한 사람에게 더 큰 박수를 보낸다.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는 ‘상식’처럼 여겨지지만, 인류 역사상 욕망의 고삐를 지금처럼 풀어놓은 적은 없었다. 과연 모든 사람들이 욕망을 한껏 키우며 이를 채우려는데도 뒤탈이 없을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욕심에 휘둘리는 현대인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낸 소설이다. 주인공 앤드리아는 작가를 꿈꾸는 대학을 갓 졸업한 여성이다. 그녀는 우연히 패션잡지인 <런웨이>의 편집장 비서로 일하게 된다. 앤드리아는 패션에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직장을 뛰쳐나오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백만명쯤 되는 여성들이 너무나 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설 속 <런웨이>는 세계적인 잡지이고 편집장인 미란다 프리스틀리는 패션계를 쥐락펴락하는 큰손이다. 세상은 권력자 옆에서 곁불만 쬐는 사람도 쉽게 무시하지 못한다. 앤드리아는 하루 열네 시간씩 일하면서 편집장의 온갖 시중을 든다. 이런 일을 하느라고 정작 자신의 삶은 형편없이 망가진다. 앤드리아는 결국 런웨이를 뛰쳐나온다. 마침내 그녀를 인정한 편집장이 던진 한마디가 되레 앤드리아의 영혼을 깨웠다. “너는 꼭 네 나이 또래의 나를 보는 것 같군.” 런웨이에서 인정받고 성공하면, 결국 앤드리아도 편집장 같은 인물이 될 뿐이다. 탐욕스럽고 배려할 줄 모르며, 남을 노예처럼 부리는 그런 사람 말이다. 자신이 꿈꾸던 삶이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로 살고 욕심을 한껏 채우는 위치까지 오르는 것이었던가? 앤드리아의 물음은 우리 스스로 되물어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내가 부러워하고 얻으려 하는 것들을 나는 진짜로 원하고 있을까? 철학자 라캉은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어린아이들은 부모가 바라는 일을 했을 때 기쁨을 느낀다. 부모의 바람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셈이다. 남들이 부러운 눈초리로 보기에 나 역시 좋은 차, 훌륭한 집을 바라고 있지는 않을까? 서점에는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한 방법을 일러주는 책들이 가득하다. 반면, 역사상 거의 모든 현인들은 우리에게 돈과 지위에 목매달지 말라고 가르쳤다. <왕자와 거지>에서 왕자는 왜 거지의 삶을 바랐을까? 우리가 그 사연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엥케이리디온〉〈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까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로렌 와이스버거 지음, 서남희 옮김
문학동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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