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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엄한 현실주의자, 착한 이상주의자

등록 2010-05-30 15:49수정 2010-05-30 15:58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고2~고3]


35. 명강의의 기술, 가슴을 울리는 가르침을 주려면
36. ‘아메리칸드림’ 대 ‘유러피언드림’ 성공과 공생의 이중주
37. 주관적인 과학과 객관적인 예술은 가능할까? - ‘통섭’에게 묻다.

9·11 테러가 일어난 후, 미국과 유럽의 관계는 잠깐 서먹해졌다. 프랑스, 영국, 스페인, 핀란드가 테러 용의자들을 미국에 못 넘겨주겠다고 버텼던 탓이다. 이유는 사형 제도에 있었다. 미국의 군사법정에서는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유럽에서 사형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형 제도를 없애지 않은 나라는 아예 유럽연합(EU)에 끼지도 못할 정도다.

많은 미국인들은 유럽인들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외교에서 도덕 윤리는 그럴싸하게 들이대는 명분일 뿐이다. 사형 당할까봐 걱정된다는 ‘핑계’로 테러범들을 감싸다니, 말이 될 법한 소리던가.

하지만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의 다른 주장을 편다. 그는 미국인과 유럽인들의 생각은 뿌리부터 다르다고 지적한다. 그는 <유러피언 드림>에서 둘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좇아 모험을 떠난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다. 당연히 미국인들에게는 ‘신이 선택한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이 있겠다.

신이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남다른 의무가 있기 마련이다. 세상의 모든 악을 없애고 선으로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 말이다. 미국인들은 자신의 바람직한 모습으로 ‘악에 맞서 싸우고 자유를 좇는 친구 같은 사람’을 떠올린다.

반면, 유럽인들은 자잘한 나라들로 쪼개진 세상에서 끊임없이 다투며 살아왔다. 20세기 들어서도 큰 전쟁을 두 번이나 치렀다. 따라서 유럽인들 마음 밑바닥에는 결투를 벌이는 대신 대화를 나누고 화해를 이끌어내는 생각이 늘 깔려있다.

나아가 미국인들은 거친 벌판을 헤쳐가며 나라를 세웠다. 그들은 자유를 ‘독립’으로 생각한다. 남과 멀찍이 떨어져 자기만의 땅과 재산을 갖고 있을 때 자유롭고 안전하다고 여긴다.

유럽인들은 어느 집단에 속하여 기댈 수 있을 때 안전하고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유럽 땅에는 좁은 땅에서 여러 민족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홀로 떨어져 있다간, 언제 다른 종족이 쳐들어와 공격할지도 모른다. 옛 유럽 도시의 집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러니 유럽과 미국이 세상을 보는 눈도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미국인들은 개인의 재산을 잘 지켜주는 정부를 훌륭하다고 여긴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은 국가의 몫이 아니다. 각자의 노력에 대한 결과를 왜 국가가 책임진단 말인가. 국가는 모두가 공평하게 경쟁할 기회만 갖도록 해주면 된다. 유럽인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 또한, 누구에게나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있다. 그러니 국가는 개인의 안전과 생활을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

제레미 리프킨은 유럽과 미국는 ‘착한 이상주의자(good guy idealist)’와 ‘엄한 아버지 같은 현실주의자(big daddy realist)’만큼이나 다르다고 말한다. 유럽은 자유와 평등, 인권 같은 이상을 좇지만, 미국은 강하고 힘센 자의 정의를 따르려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유럽연합(EU)의 기초를 닦은 중요한 책이다. 칸트의 주장을 따라가 보면, 지금의 미국과 유럽이 꿈꾸는 세상이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칸트는 전쟁을 나쁘게만 보지 않는다. 전쟁을 하려면 시민들에게 자유를 줄 수밖에 없다. 전쟁에는 엄청난 돈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충분히 세금을 거두려면 시민들이 자유롭게 장사를 하고 사업을 벌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전쟁을 하는 데는 시민들의 의견을 모으는 일도 중요하다. 국가가 시민들을 우습게보고 제멋대로 한다면 전쟁을 제대로 치르기 힘들다. 전쟁은 이렇듯 나라를 민주주의로 이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군사력을 갖고 있는 나라다. 그러면서도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가장 앞세우는 나라이기도 하다. 전쟁은 되레 자유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칸트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칸트는 힘센 나라가 세상을 다스리는 모습을 결코 좋게 보지 않는다. ‘강압적인 평화는 전쟁보다 위험하다.’ 힘센 자에게 짓눌려서 큰소리가 안 나올 뿐이라면 바람직한 평화라 보기 어렵다. 칸트는 영원한 평화는 모든 나라가 공화국일 때만 이뤄진다고 말한다. 시민들이 평등하고 제 목소리를 내는 세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아가 칸트는 영원한 평화는 자유로운 국가들이 연방을 꾸릴 때에야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모든 나라가 충분히 의견을 내놓고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영구평화론>에는 미국이 좇는 ‘아메리칸 드림’과 유럽이 꿈꾸는 ‘유러피안 드림’이 어우러지는 세상을 보여주는 듯싶다. 게다가 지금의 유럽연합은 칸트가 꿈꾸던 세상의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질 무렵, 사람들은 전쟁을 일어나리라 믿지 않았다. 거래를 맺고 있는 장사치들은 상대를 죽일 만큼 다투는 일이 없다. 상대가 사라지면 나에게도 손해가 되는 까닭이다. 이미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여러 이권으로 단단히 얽혀 있었다. 그럼에도 전쟁은 일어났고 유럽의 나라들은 죽기 살기로 싸웠다. 그것도 두 번 씩이나 말이다. 이익 관계로 평화를 지키려는 노력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 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권과 자유, 평등과 같은 가치는 뜬구름 잡는 소리 같다. 결국 세상은 힘 센 사람이 지배하지 않던가. 그러나 우리는 강한 자보다 정의로운 사람에게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힘으로 버티는 나라는 힘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나 정의로운 나라는 힘으로 쓰러뜨릴 수 없다. 사람들의 바람을 업고 끊임없이 일어서는 까닭이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인권과 자유, 평등, 배려 같은 덕목(德目)들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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