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지적능력의 총화’
기술 가르친다고 되지않아
기술 가르친다고 되지않아
김창석 기자의 서술형 논술형 대비법
③ 글쓰기와 글짓기는 다르다
④ 글은 손가락 끝에서 나오지 않는다
⑤ 글을 제대로 읽는 것이 우선이다 이런 부모들이 있다. 네 살짜리 아이가 어려운 책을 읽는다고 좋아하는 부모들 말이다. 이런 부모들의 공통점은 아이가 책의 내용을 이해했는지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읽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독서가 아니다. 문자를 소리내어서 읽을 줄 아는 것뿐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쓰기를 일종의 잔재주나 테크닉으로 이해하는 부모들은 서술형·논술형 시험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글쓰기 교실로 내몬다. 기술을 가르치면 되는 줄 알기 때문이다. 무조건 많이 써보면 글 실력이 늘어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글은 손가락 끝에서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일기를 어릴 때부터 매일 써본 사람들이나, 문학작품 습작을 어릴 때부터 한 이들은 글쓰기에 능숙한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도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은 그들이 일기나 습작을 통해 글쓰기 기술을 익힌 게 아니라는 것이다. 글쓰기를 잘하려면 두 가지 필수조건이 있다. 읽기와 생각하기가 그것이다. 읽기와 생각하기를 전제로 하지 않고 글쓰기에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릴 때부터 풍부한 독서와 함께 독서를 자신의 지식으로 바꿀 수 있는 자기식의 생각 경험을 하지 않은 아이에게 깊은 글쓰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격이다. 그런 면에서 글쓰기는 상당히 오랜 기간 공을 들여야 하는 학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머리가 좋은 아이들을 구분하는 방법에서도 드러난다. 말을 잘하는 아이와 글을 잘 쓰는 아이가 있다고 하자. 글을 잘 쓰는 아이는 예외없이 머리가 뛰어난 데 비해서 말을 잘하는 아이는 머리가 좋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신기한 일이다. 왜 그럴까.
간단하다.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더 뛰어난 지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말하기라는 의사소통 방식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 그러나 글쓰기는 자연스럽게 익혀지지 않는다. 말하기가 걷기라면 글쓰기는 달리기다. 음성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인 말하기는 다른 영장류에서도 비슷한 형태가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글쓰기는 인간 이외에 다른 동물들한테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인간만의 지적 능력이다. 고도로 발달된 지적 능력인 셈이다. 동시대인들이 이룩한 문화적 유산을 글쓰기를 통해 후대에 전하지 않았다면 현재 인류가 이뤄놓은 지적 유산은 없었을 것이다. 글쓰기가 지닌 이런 위상 때문에 각종 시험에서 글쓰기가 중요하게 쓰이는 것이다. 대학 입시에서 논술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는 것도 ‘지적 능력의 총화’라는 글쓰기의 속성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진리를 까먹는 경우가 많다. 글쓰기를 무슨 암기식 공부와 같은 종류로 착각하는 경향 말이다. 벼락치기 공부로 글쓰기에 접근하면 안 된다. 서술형·논술형 시험이 많아졌다고 무작정 일기를 강요하면 안 될 일이다. 오히려 글쓰기에 대해 감정적인 반발을 불러오거나, 부정적인 이미지만 굳어질 공산이 크다. 처음부터 한 계단, 한 계단씩 올라가야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학교의 내신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공부의 하나로 글쓰기를 생각하는 대신 아이들이 평생 써먹을 수 있는 핵심적·근본적 능력을 키우기 위한 공부로 생각하면 좋다. 글쓰기는 말하기에 비해 공식적인 의사소통방식이다. 사적인 일보다 공적인 영역에서 일하려면 글쓰기가 필수적인 세상이 됐다. 자신이 뜻하는 바를 글쓰기를 통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능력을 갖춰야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글은 손가락 끝에서 나오지 않는다. 머리에서 나온다. 읽기와 생각하기가 뇌 속에서 변증법적인 화학작용을 일으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결과가 글쓰기인 셈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양질전화의 과정을 무시하고 억지스럽게 생산물을 만들어내려는 것은 글쓰기를 정신노동의 과정이 아닌 물질적 상품생산의 과정으로 잘못 이해한 소치다. 김창석 기자 kimcs@hanedui.com
④ 글은 손가락 끝에서 나오지 않는다
⑤ 글을 제대로 읽는 것이 우선이다 이런 부모들이 있다. 네 살짜리 아이가 어려운 책을 읽는다고 좋아하는 부모들 말이다. 이런 부모들의 공통점은 아이가 책의 내용을 이해했는지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읽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독서가 아니다. 문자를 소리내어서 읽을 줄 아는 것뿐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쓰기를 일종의 잔재주나 테크닉으로 이해하는 부모들은 서술형·논술형 시험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글쓰기 교실로 내몬다. 기술을 가르치면 되는 줄 알기 때문이다. 무조건 많이 써보면 글 실력이 늘어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글은 손가락 끝에서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일기를 어릴 때부터 매일 써본 사람들이나, 문학작품 습작을 어릴 때부터 한 이들은 글쓰기에 능숙한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도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은 그들이 일기나 습작을 통해 글쓰기 기술을 익힌 게 아니라는 것이다. 글쓰기를 잘하려면 두 가지 필수조건이 있다. 읽기와 생각하기가 그것이다. 읽기와 생각하기를 전제로 하지 않고 글쓰기에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릴 때부터 풍부한 독서와 함께 독서를 자신의 지식으로 바꿀 수 있는 자기식의 생각 경험을 하지 않은 아이에게 깊은 글쓰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격이다. 그런 면에서 글쓰기는 상당히 오랜 기간 공을 들여야 하는 학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머리가 좋은 아이들을 구분하는 방법에서도 드러난다. 말을 잘하는 아이와 글을 잘 쓰는 아이가 있다고 하자. 글을 잘 쓰는 아이는 예외없이 머리가 뛰어난 데 비해서 말을 잘하는 아이는 머리가 좋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신기한 일이다. 왜 그럴까.
간단하다.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더 뛰어난 지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말하기라는 의사소통 방식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 그러나 글쓰기는 자연스럽게 익혀지지 않는다. 말하기가 걷기라면 글쓰기는 달리기다. 음성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인 말하기는 다른 영장류에서도 비슷한 형태가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글쓰기는 인간 이외에 다른 동물들한테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인간만의 지적 능력이다. 고도로 발달된 지적 능력인 셈이다. 동시대인들이 이룩한 문화적 유산을 글쓰기를 통해 후대에 전하지 않았다면 현재 인류가 이뤄놓은 지적 유산은 없었을 것이다. 글쓰기가 지닌 이런 위상 때문에 각종 시험에서 글쓰기가 중요하게 쓰이는 것이다. 대학 입시에서 논술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는 것도 ‘지적 능력의 총화’라는 글쓰기의 속성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진리를 까먹는 경우가 많다. 글쓰기를 무슨 암기식 공부와 같은 종류로 착각하는 경향 말이다. 벼락치기 공부로 글쓰기에 접근하면 안 된다. 서술형·논술형 시험이 많아졌다고 무작정 일기를 강요하면 안 될 일이다. 오히려 글쓰기에 대해 감정적인 반발을 불러오거나, 부정적인 이미지만 굳어질 공산이 크다. 처음부터 한 계단, 한 계단씩 올라가야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학교의 내신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공부의 하나로 글쓰기를 생각하는 대신 아이들이 평생 써먹을 수 있는 핵심적·근본적 능력을 키우기 위한 공부로 생각하면 좋다. 글쓰기는 말하기에 비해 공식적인 의사소통방식이다. 사적인 일보다 공적인 영역에서 일하려면 글쓰기가 필수적인 세상이 됐다. 자신이 뜻하는 바를 글쓰기를 통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능력을 갖춰야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글은 손가락 끝에서 나오지 않는다. 머리에서 나온다. 읽기와 생각하기가 뇌 속에서 변증법적인 화학작용을 일으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결과가 글쓰기인 셈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양질전화의 과정을 무시하고 억지스럽게 생산물을 만들어내려는 것은 글쓰기를 정신노동의 과정이 아닌 물질적 상품생산의 과정으로 잘못 이해한 소치다. 김창석 기자 kimcs@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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