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개 직업 전전…질풍노도의 삶
민중사 길 닦고 역사대중화 주도
“역사바로잡기·과거청산 등 보람”
민중사 길 닦고 역사대중화 주도
“역사바로잡기·과거청산 등 보람”
[길을찾아서] 여덟번째 주인공 원로 역사학자 이이화
“어떻게 내 인생사를 쓰게 됐냐고? 그건 순전히 내 술버릇 탓이여.”
원로 역사학자 이이화(75·사진) 선생은 12일부터 <한겨레>의 원로 회고록 ‘길을 찾아서’ 여덟번째 이야기(민중사 헤쳐온 야인) 화자로 등장하게 된 사연을 농담처럼 털어놓았다. “술기운이 오르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져서는 남달리 굴곡졌던 인생사 몇토막을 떠들어대곤 했더니 주변에서 파란만장 흥미진진하다며 신문에 남겨야 한다고들 해서 말이여.”
오랫동안 그의 이름 앞에는 ‘재야’ 또는 ‘야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이는 그가 단순히 제도권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거나 대학 같은 주류 학계와 교유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1981년 40대 중반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전문위원 명함을 갖기까지 독학으로 ‘사학자’의 길을 개척했고 ‘민중사·생활사’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일궈냈다.
“난 서자로 태어난데다 팔삭동이로 허약해서 키도 몸집도 평균에 한참 못 미치고, 아버지의 신념과 가난한 살림 탓에 초등학교도 못 댕겼어.”
일제의 민족말살과 수탈이 극으로 치닫던 1936년 대구 비산동 빈민촌에서 태어난 그는 부친인 한학자이자 주역의 대가인 야산 이달 선생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 한국전쟁 와중인 15살 무렵 가출한 그는 고아원에 의탁하거나 고학을 하면서 부산·여수·광주 등을 떠돌다 여관 종업원 노릇을 하며 광주고를 졸업했다.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들 하잖어. 한마디로 사회의 밑바닥을 헤매며 온갖 풍상을 겪던 시절이었제.”
애초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입학해 훗날 저마다 필명을 날릴 선배 문필가들과 어울려 ‘문학청년’의 꿈을 키우던 것도 잠시,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중퇴한 그는 설상가상으로 위암 말기 진단을 받은 홀어머니를 돌보고자 아이스케키·빈대약 장수, 술집 웨이터, 가정교사 등등 20여가지 직업을 전전해야 했다. 주소 불명으로 병역기피자가 되는 바람에 변변한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다 어떻게 역사 전문가가 됐냐고? 그건 순전히 내 아버지 훈육 덕분이여.”
20대 후반 자신도 모르게 한국사 읽기에 빠져든 그는 30대 초반 병역 면제를 받아 <동아일보> 출판부와 색인실에서 임시직으로 일하게 됐다. “아버지한테 담뱃대로 머리를 터져가며 익힌 한학 덕분에” 한자에 밝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그는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실, 서울대 규장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에서 본격적으로 고전과 역사를 연구할 수 있었다. 논문과 기고문 등을 통해 학계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그는 86년 역사문제연구소 설립 때 참여한 뒤 소장이자 <역사비평> 편집인으로서 동학농민전쟁 등 민중·생활사 연구와 역사답사기행 등을 주도하며 역사 대중화에 나섰다. 95년부터 10년 동안 칩거하며 써낸 5000년 한국통사인 <한국사 이야기>(22책)는 필생의 역작으로 꼽힌다.
“돌이켜보니 내 자신 역사 연구자로서 보람이 있었다면 ‘역사바로잡기운동’과 ‘과거사 청산’ 같은 민족사적 소명에 작으나마 힘을 보탠 것을 들 수 있겠어요.” 그는 2004년부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이사장,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상임대표 등을 맡았고 친일반민족행위 관련 단체 조사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에도 참여했다.
“내가 원래 잘 울거든. 쓰다 보니 홀로 공동묘지에 가서 자살을 고민했던 순간이며 고생스러웠던 날들이 떠올라 눈물이 나더라구.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힘없고 외롭게 사는 이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으면 해.” 그는 자신의 약점과 실수까지 진솔하게 털어놓되 겪어온 인물들의 행태도 가감없이 밝혀 한국 사회의 한 시대상을 그려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글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