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부친 야산 선생의 주역을 연구하는 모임인 동방문화진흥회 회원들과 함께 지난 3월 충남 태안군 정당리 개락금마을을 답사하며 옛 풍경을 설명하고 있다. 필자 가족과 제자들은 야산을 따라 1948년 충남 서산 달산리를 거쳐 정착한 이곳에서 한국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8
1948년 초봄 아버지는 우리 식구들에게 또 이사하라고 일렀다. 우리는 남부여대를 하고 걸어서 논산에서 강경으로 나왔다. 강경에서 아버지 제자 집에서 하룻밤을 잔 우리는 배를 타고 서산군 남면 달산리로 왔다. 심한 배멀미를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새로 살 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나누어져 있긴 했지만 방 세칸짜리 허름한 초가였다. 게다가 살인사건이 난 집이어서 팔리지 않았던 이를테면 ‘흉가’였다.
이때 우리 식구는 오촌 당숙네 7명, 사촌 3명을 합해 무려 24명이나 됐다. 그중에는 이리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내 동생(태화·兌和)도 있었고, 글을 배우러 온 이재경이란 군식구도 있었다. 그러니 방이 좁아 누울 자리가 없어서 안식구들은 앉아서 밤을 지내야 했다.
그 시절 아버지가 출타중일 적에는 큰형님(진화·震和)이 대신 글을 가르쳤는데 이분 말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나보다 27살이나 위인 형님은 어릴 적 아버지의 가르침과 동네 서당에서 글을 익혀서 편지도 쓸 줄 알고 예식도 알아 시골선비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천성이 아주 게을렀다. 그래서 가르칠 때 늘 건성이었다. 아침에 글을 가르치고 나서 다음날 다시 ‘외우기 강’을 하지도 않았으며 우리에게 빈둥거리며 논다고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래서 또래 이재경과 나는 눈치껏 놀아댔다. 갯가에서 굴을 따 먹기도 하고 낙지를 잡아 먹기도 했다.
이 무렵 아버지는 배를 한 척 사두고 우리 일행의 짐을 나르는 운송수단으로 이용했다. 여기에서 표현한 ‘일행’은 세상에서 말하는 주역패를 이르는 말이다. 배는 ‘태극환’이란 이름을 달고 광천에서 안면도 독개로 사람과 짐을 실어 날랐다.
당시 안면도 일대에는 이른바 주역패 300여호가 이사를 와서 살았다. 원주민으로 아버지의 제자가 된 양씨 형제들은 상당한 자산가였는데 외지에서 온 주역패를 뒤치다꺼리하느라 살림이 거덜났다. 아버지는 경상도 등지에서 제자들을 이곳으로 오게 했다. 그들은 주로 안동·예천·문경·김천·성주 등지의 사람들이었다. 300호가 넘는 경상도 사람들이 좁은 섬에서 억센 사투리로 와글거리니 조용한 섬이 시끄러울밖에. ‘야산 선생이 큰 전쟁이 난다고 해서 피난 왔다’고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석천암이 있던 대둔산 일대는 한국전쟁이 나자 인민군 게릴라들이 차지해 쑥대밭이 되었고 우리가 살던 집도 불타버렸던 것이다.
아무튼 아버지는 ‘편안하게 잠잔다’는 뜻을 지닌 안면도(安眠島)를, 일제 이전대로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을 지닌 안민도(安民島)로 바꾸어 부르게 했다.
아버지는 광천역 앞에 솥공장과 성냥공장을 차려놓고 제자들에게 도부(행상)로 팔아 생계를 삼게 했다. 처음 이사를 온 사람들은 재산을 판 돈으로 겉보리를 사서 일행의 가구마다 한 가마니씩 나누어주게 했다. 호수가 늘어나니 차츰 겉보리 사는 값이 더 많이 들어갔다. 그들은 도부로 생계를 이었다. 도부 장수들은 광천에서 독개로 부지런하게 왕래했다.
또 아버지는 방직공장에서 폐품이 된 실을 사와 잇는 작업을 직접 해보이면서 실을 팔게 했다. 폐품을 재생산한 것이다. 또 미국의 농학박사인 정아무개를 모시고 와서 땅콩을 심을 토질을 조사하기도 했다.
우리 식구들은 달산리에서 1년쯤 산 뒤, 독개 옆에 있는 외딴 마을인 개락금으로 이사를 하게 했다. 이 마을에는 배를 부리는 김씨 형제들이 살고 있었는데 무슨 연유인지 아버지의 제자가 되었다. 이들은 자기네들의 널찍한 집을 스승댁으로 비워주었다. 집은 우리 식구들이 잠자기에 넉넉했으며, 환경은 참으로 천혜의 아늑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는 경상도에서 이사온 주역패 20가구쯤이 집단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곳에서 큰형님은 다시 서당을 차렸으나 거의 나만 달랑 가르치고 나머지 아이들은 내가 대신해 가르치게 해서 나는 10대 초반의 나이에 접장으로 출세했다. 동문수학이라 할 나의 질녀(조카딸)들도 이때쯤에는 내가 가르쳤다. 내 질녀들은 평소에는 나를 함부로 대했는데 글 배울 때만은 고분거렸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