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했던 논문 ‘허균과 개혁사상’을 수정보완해 81년에 뿌리깊은나무에서 펴낸 필자의 첫 저서 <허균의 생각-그 개혁과 저항의 이론>. 유신헌법 공표 이후 공포정치 상황에서 나름의 저항정신을 표현한 글이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25
1974년 동아일보사에서 해고된 나는 다시 실직자 신세로 여기저기 잡문을 쓰거나 번역 일을 하며 지냈다. 월간 <신동아>에 논픽션인 ‘신규식 평전’을 써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신규식은 임시정부 창립 때부터 참여해 외무총장 등을 지내면서 내분을 겪자 단전호흡법으로 자살한 독립지사인데 국내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나는 1970년대 초반부터 그의 저술인 <한국혼>을 분석하고 평가하면서 잊혀진 지사의 삶을 추적했던 것이다. <한국혼>은 우리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키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인데 웅혼한 필치가 감동을 주었다. 이 글은 신채호가 집필해 의열단이 공포한 ‘조선독립선언서’와 쌍벽을 이룬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이를 내가 처음 발굴해 대중에게 알린 셈이었다.
그러나 실상 나는 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된 뒤 30대 후반의 한동안을, 고전과 역사와 글쓰기와 술 속으로 ‘피난’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가 공포정치를 펴는 동안 책에 파묻혀 현실을 잊거나 글을 쓰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고작 술을 마시고서야 울분을 토해내는 국외자에 불과했다. 이른바 지식인의 나약함을 보여준 전형적인 현실도피의 삶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시대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72년 10월 박정희는 ‘유신혁명’으로 포장한 영구집권을 위해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는 개헌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계엄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유신헌법은 91%가 넘는 압도적 지지율로 통과됐다. 이 헌법에 따라 발족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장충체육관에서 박정희를 6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 과정에서 장준하가 이끌던 진보민족진영의 대변지 <사상계>는 이미 폐간되었으며 언론은 완전 통제돼 어용 매체만 남았다. 남북회담은 중지되었고 ‘정적’인 김대중은 일본에서 납치되었다.
일반 국민들은 숨을 죽였으나 학생들은 유신 반대 시위를 벌였고 민주인사들은 유신헌법 폐지와 개헌 서명운동에 나섰다. <동아일보> 기자를 비롯한 젊은 언론인들도 나서서 민주주의와 자유 수호를 외쳤다. 이 때문에 광고 탄압을 받아 경영난에 빠지자 동아일보사는 기자를 대량 해고하는 무리한 일을 저질렀다. 하지만 민주인사들은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발족시켜 유신 반대 서명을 벌이고 신민당 의원들은 국회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에 유신정권은 대통령 긴급조치를 연달아 발표하며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철, 김지하 등이 사형선고를 받은 민청학련 조작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박정희는 재일동포 문세광에게 저격을 받았으나 용케 살았고 부인 육영수가 총탄에 맞아 죽었다. 많은 교수들이 대학에서 쫓겨났고 학생들은 제적을 당하거나 군대에 끌려가거나 감옥에 갇혔다. 민주인사들은 76년 3·1절에 민주구국선언을 한 이른바 ‘명동사건’ 등으로 잇따라 체포·구금되었다. 그럴수록 학생 시위와 저항은 더욱 격화되었다. 박 정권은 전국을 병영으로 만들어 아마도 4·19 혁명 때보다 더 탄압에 따른 피해가 엄청났던 것이다.
그러다 나 나름의 저항방식을 찾게 된 것은 신경림 시인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동화출판공사에서 한국사상집 번역작업을 하던 무렵 편집부장이었던 신경림 시인과 자주 만났다. 신 시인은 일제시기와 해방공간에서 활동한 전석담, 이청원 등 사회주의 계열 학자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나도 자취방 옆에 사는 정아무개에게 이와 관련된 책을 얻어 읽어본 적이 있어서 대화가 아주 잘되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애독하던 <사상계>가 폐간된 뒤 <창작과 비평>을 애독하던 무렵이었다. 신 시인이 ‘창비’ 인사들과 친해 자주 화제를 삼았는데 나는 창비에 실린 한국학 관련 글을 평하면서 앞으로 나도 이런 내용의 글을 쓰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당시 유신에 저항한다는 의식으로 현실에 저항하고 개혁을 부르짖다가 죽은 허균의 생애와 사상을 쓰려고 자료를 모아 공부하고 있었다. 뒤에 자세히 설명할 것이지만, 당시 신 시인이 다리를 놓아 ‘창비’에 논문 ‘허균과 개혁사상’(1973년)을 발표했다. 이 글에는 분명히 저항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고 독자들도 곧 알아차렸다. 반응이 아주 좋았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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