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교육

연구 대신 연찬회…‘바늘방석’ 정신문화연구원 사직

등록 2010-11-29 09:21

1981년 필자가 1년간 몸담았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박정희(왼쪽)가 유신이념의 한국 사상사적 체계화를 위해 ‘만주 시절 인맥’인 이선근(오른쪽) 원장을 내세워 78년 문을 열었다. 사진은 76년 6월 당시 동국대 총장이던 이 원장이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을 만나고 있는 모습.
1981년 필자가 1년간 몸담았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박정희(왼쪽)가 유신이념의 한국 사상사적 체계화를 위해 ‘만주 시절 인맥’인 이선근(오른쪽) 원장을 내세워 78년 문을 열었다. 사진은 76년 6월 당시 동국대 총장이던 이 원장이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을 만나고 있는 모습.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34)
1978년 6월 문을 연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박정희 정권 시대, 한국학 정립을 위해 방대한 <민족문화백과사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유신정권을 출범시킨 뒤 세종이 민족문화를 진작시킨 산실인 집현전을 본떠 경기도 성남 산골짜기에 ‘정문연’을 지어 출범시켰다. 터를 잡고 건물을 지을 때 박정희는 헬기를 타고 직접 돌아보면서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특별 대우를 해줘서인지 이곳에는 어용 교수들이 몰려들었다.

81년 <민족문화백과사전>의 편수 책임자인 최근덕(현 성균관 관장) 선생이 나와 김동주·이정섭을 편수원으로 추천했다. 이른바 ‘스카우트’한 셈이다. 편수원은 연구원과 같이 전임강사 이상의 대우를 해줬다. 그래서 한동안 고민하다가 규장각의 고전 해제 1차분 출간도 마친 때여서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처음 얘기와는 달리, 최 선생은 당황해서 우리에게 ‘편수원’은 학위 소지자(석사 박사)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김대환 부원장(전 이화여대 교수)이 편수원을 전문위원(서기관급 대우)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고 전했다. 그래서 전문위원으로 오라고 하기가 주저된다고도 전했다. 하지만 규장각의 신용하 실장에게 이미 물러간다는 말을 전해 동의를 받은 처지였고 해제 작업을 돕는 대학원생들과 작별인사까지 한 뒤여서 말을 뒤집기가 어려웠다. 당시 원장은 고병익, 연구부장은 박병호 교수여서 조금 든든하기도 했다.

그해 봄이었다. 우리 세 사람에게 넓은 연구실 두 개를 배정해줬는데 내가 한 방을 차지했다. 처음 시작한 일은, 이미 받아놓은 원고의 검토 작업이었다. 보기를 들면 ‘조선의 양반’이나 ‘조선 후기의 실학’ 등 굵직한 주제를 쓴 것들인데 한 주제마다 200자 원고지 100장이 넘는 분량이었다. 그때 원고료가 1장에 1만원쯤이었다고 했으니 엄청난 이권이 따르는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원고를 검토해보니 한심한 문제들이 드러났다. 우선 원전과 틀린 사실을 적어 놓은 원고들이 많았다. 단군 관련 사실을 쓰면서 ‘당요’(唐堯·중국 고대 당나라를 세운 요임금)를 이해하지 못하고 ‘후기 당나라’로 잘못 쓴 것도 있었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였던 최아무개 원로학자가 쓴 것이었다. 또 실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아무개 교수는 실학과 관련한 원고에서 “맹자가 낮에 우물을 팠다”는 풀이를 해놓았다. 이것은 중국 고대 ‘정전법’(井田法·토지 구획제도)을 말한 것인데 엉뚱하게도 우물이라 쓴 것이다.

두어 달 작업을 한 뒤, 우리 세 사람은 각기 검토한 원고를 들고 고 원장과 마주 앉았다. 한숨을 길게 내쉰 고 원장은 “우리 약속합시다. 내가 이를 처리할 테니 밖에는 비밀로 합시다”라고 제의했다. 그때만은 우리도 약속을 잘 지켰다.

이런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한 사람이 몇 건씩 써댔다. 또 자신이 쓴 게 아니라 대학원생들을 동원해 적당히 베껴서 사실 오류는 말할 나위도 없었고 한자를 틀리게 쓰기 일쑤였다. 글씨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이게 교수들의 양심이었으니….

그런데 그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정문연에서 연찬부를 두고 국회의원이나 공공단체의 책임자들을 불러, 국가관을 확립한다는 구호 아래 이른바 1주일씩 연찬을 벌이는 것이다. 또 연초에는 대통령 전두환이 연두순시를 구실로 장관과 경호원을 줄줄이 달고 찾아왔다. 그럴 때면 뒷산에 경호원들이 쫙 깔렸고 원내는 삼엄한 경비망이 쳐졌다. 그는 연구원들을 줄세우고서 중언부언 떠벌렸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부원장으로 부임한 김아무개 교수가 툭하면 나를 불렀다. 자신이 쓴 <한국행정사>를 전면 개편할 계획인데 나보고 보충 원고를 써달라는 것이다. 내가 이런 짓이나 하려고 여기에 왔겠나. 나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무렵 누가 어디서 일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말을 머뭇거렸다. 윤구병의 집에서 당시 서울대 대학원생인 홍윤기(동국대 교수)를 만났을 때는 이런 소동도 있었다. 내가 술이 취해 ‘정문연’에 몸담고 있는 처지를 두고 푸념을 하자, 그가 대뜸 “내가 선생님 뺨을 한 대 때리겠습니다”라고 하더니 진짜로 내 뺨을 때린 것이다. 이튿날 아침 술이 깬 홍윤기는 절을 하면서 사과를 했지만 나는 별로 섭섭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길에서 만난 나병식(풀빛출판사 대표)은 ‘지금도 정신병원’에 다니고 있느냐’고 비아냥거렸다.(훗날 그는 자신이 그렇게 말한 게 아니라 내가 먼저 그렇게 말했다고 변명하곤 했다.) 사실 민주인사들은 정신문화연구원을 두고 곧잘 ‘정신병원’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1년만 채우기로 작정하고 견디던 나는 마침내 송병기 편수부장(단국대 교수)에게 사표를 냈다. 그는 조금만 더 참아주면 편수원으로 바꾸어 주겠다면서 사표를 반려했다. 그래도 내가 고집을 부리자 부원장은 “나 때문에 그만두려 하느냐”면서 힐난했으나 아니라고 둘러대고 끝내 물러나왔다. 박병호 교수가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역사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