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경기도 구리 아차산 밑 아치울 마을에 정착한 필자는 이웃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25년간 살았다. 문화예술인들의 명소로 소문나면서 부인 김영희씨의 손님 접대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동아일보> 2004년 3월13일치)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35
1981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1년 남짓 일할 때 월급을 집의 통장으로 바로 보냈는데, 아내는 ‘살림 느는 소리가 들린다’며 좋아했다. 그런데 내가 그만둘 때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았다고 아내는 내내 서운해했다. ‘정문연’에서 마지막날 이재범(경기대 교수) 등 젊은 연구자들이 집으로 몰려와 위로를 했다.
그때 나는 <허균의 생각>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 원고 청탁도 많이 들어오고 해서 번역을 비롯해 한국사 저술에 몰두해도 살아갈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에게 조용히 글을 쓸 공간이 필요하니 서울을 떠나 전원생활을 해보자고 했다. 여기저기 물색하다가 아차산 밑 아치울에 자리를 잡았다.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이다. 아내는 잠실의 아파트를 팔고 또 빚을 내서 어렵게 아담한 집을 지었다. 그나마 아이들 학군이 서울시내인 광장동이어서 적이 안심을 하는 눈치였다. 그때만 해도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인 이 마을로 오는 길은 포장도 되어 있지 않았고 버스도 30분 간격으로 다녔다. 하지만 아주 아늑한 곳이었다.
나는 집을 짓는 동안 딱 두번 들렀다. 한번은 집터를 다지고 나서 공사를 시작하던 날, 또 한번은 상량식을 하면서 고사를 지내던 날이었다. 아내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너무 무심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도 했다. 사실 글 쓰는 일이 바쁘기도 했지만 아내가 일을 잘 처리하니까 마음을 놓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82년 늦가을 이사를 온 뒤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아내는 결혼 전 세무서에서 일했던 만큼, 내 월급·원고료·강연료 등을 챙겨 세무서나 시청에 드나들면서 세금정산을 잘해주었다. 평생 비서 노릇을 한 셈이다. 또 집이나 자동차 따위도 모두 아내 명의로 했다. 그래서 내가 친구들에게 “나는 무소유야”라고 떠들면 “너는 마누라 없었으면 쪽박 찰 놈이야”라고들 대꾸했다. 다만 이것저것 잔소리가 많아서 탈이지….
내가 아치울로 이사 오기에 앞서 화가 하인두 선생이 먼저 이 마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자유분방한 화가의 기질에다가 글쓰기를 좋아해서 문인의 끼도 강했다. 그가 이곳에 살게 되자 김점선·신영식 등 화가 조각가들이 뒤따라 들어와 살았다. 예술인 마을로 소문날 만했다. 이들은 모두 술꾼이었다. 그래서 개울가에서 보신탕을 곁들여 소주를 마시기도 했고 집집을 돌며 맥주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간혹 규장각 소장 학자들과는 다른 분위기여서 시사 얘기는 될수록 피했다.
어느날 하 선생이 우리와 김점선 화가의 식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 자리에 가보니, 민정당 사무요원인 김아무개(훗날 민주당 국회의원) 부부도 와 있었다. 술이 오르자 내가 김아무개에게 왜 민정당에 들어가게 되었느냐고 그 동기를 물었다. 그랬더니 “제가 정치가가 되려고 하는데 그 꿈을 일단 신생 정당에서 활동하면서 키우려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나 혼자 떠들어댔다. 끝내는 아내가 나를 끌고 나오고 말았다.
이 일로 해서 하 선생 부인인 유민자 화가에게 인심을 잃게 되었다. 그분은 바로 민정당 중앙위원을 맡으면서 전두환과 함께 찍은 사진을 응접실에 걸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 응접실에는 발길을 들이지 않았다. 그 뒤로 하 선생도 나를 경계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 녀석도 내가 술주정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창피해. 아빠하고 같이 안 다닐래”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들로부터 ‘생애 첫 도전’을 받은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 아이들 얘기를 잠깐 하자면, 아들 응일이는 이 동네에서 유치원을 다녔고 딸 응소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 아이들에게는 이 동네가 고향인 셈이다. 아내는 아침에만 승용차로 아이들을 태워 학교를 통학시켰고 퇴학길에는 버스를 타고 오게 했다. 나는 아들과 딸에게 학과 공부는 특별하게 가르쳐준 게 없었다. 공부를 잘하라든가, 숙제를 해준다든가 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아내는 평소에 마을이나 광장동에 있는 학원에 보내기는 했으나 절대로 과도하게 시키지는 않았다. 다만 상급학교 입학을 앞두고는 일정 기간 논술과목 등 제한적으로 과외를 시키는 정도였다.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역사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