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필자가 불심검문에 걸려 곤욕을 치른 저서 <역사와 민중>(왼쪽). 당시 군부정권이 철저하게 통제하던 이른바 ‘불온서적’(오른쪽) 목록에 필자의 책과 글도 일부 포함돼 있었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38
1984년 성심여대에 출강하던 어느날, 새로 출간된 내 책 <역사와 민중>(어문각 펴냄)을 가방에 여러 권 넣고 신도림역에서 전철을 갈아타려고 가는데 사복경찰이 부르더니 전철역사 한쪽에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내 책을 꺼내들고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그 책에는 그동안 여러 곳에서 쓴 글을 모아 놓았는데, 일제 시기의 소작쟁의·노동쟁의·노동야학·형평운동 등을 다룬 글이 포함되어 있었다. 글의 제목만 보고 그는 불온서적이라고 우겨댔다. 그러면서 몇 곳에 전화를 걸어 내 저작물이 금서목록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때 잠깐이지만 내 첫 책 <허균의 생각>과 <홍남순 회갑논문집>에 쓴 글 등 몇 편의 논문이 금서로 묶여 있었다.
나는 책상을 발로 차고 소리를 지르며 항의했다. 한번 흥분하면 자제하지 못하는 내 성격이 폭발을 한 순간이었다. 그는 결국 나를 풀어주었다. 학교에 와서 강의에 늦은 사연을 얘기했더니 다른 교수들도 분노했다.
아무튼 10여년 동안 대학 출강을 하면서 소장 학자들로부터 배운 점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이었으나 흔히 말하는 ‘이병도 사학의 아류’에 드는 차세대가 아니었다. 현실문제와 역사의식을 고유하는 진보적 학자들이었다고 할까.
출강 때 얘기를 하나 더 해보자. 서강대 최재현 교수(사회학과·1991년 작고)가 서강대에 출강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치학과·사회학과·사학과 등 사회과학 전공 학생을 대상으로 한국 근대사를 강의하는 통합강의를 한다고 했다. 개강하는 날, 마침 최 교수는 나오지 않았다. 인사를 하려고 학과 사무실에 들어가 보니 교수들이 없어서 당시 학과장 연구실로 찾아갔다. 외국인인 학과장은 가방을 든 나를 힐끗 보더니 다짜고짜로 ‘나 책 안 사요’라고 말하고 돌아앉았다. 나는 ‘아뿔싸 실수했구나’라고 여겼다.
강의실에 들어가니 학생들이 120여명쯤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외래강사의 수업으로는 처음으로 수강생이 그렇게 많았다고 한다. 너무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출석은 부르지 않기로 하고, 근대사 강의 순서와 참고 목록을 적어준 뒤 신이 나서 열강을 했다. 그런데 한 학기를 다 마치는 동안 최 교수밖에는 말을 섞은 교수도 없었고, 안면을 트는 회식 자리도 한번 없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불거졌다. 첫 시험을 보고 나서 채점을 하는데, 어찌된 노릇인지 잘 쓴 답안지일수록 기존 논문을 표절했다. 또 나중에 낸 보고서는 거의 신용하 교수 등의 논문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그래서 그런 답안지는 모두 에프(F)로 처리했다. 그랬더니 ‘난리’가 났다. 최 교수는 내게 조금 사정을 하다가 통하지 않자 당사자인 학생들에게 청탁을 넣든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다. 해당 학생들은 내가 만나주지도 않자 집으로 뻔질나게 전화를 해대면서 “삼성에 취업을 하는데 에프 학점 성적표를 내면 들어갈 수 없다”는 따위의 말을 하면서 통사정을 했다. 하지만 나는 “답안지부터 표절을 하면 사회활동을 하면서 무슨 짓을 하겠나”라고 타이르면서 고쳐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훗날 들으니 학교 당국에서 적당히 처리했다고 한다. 그다음 학기에는 인기 정도나 강의 내용을 따질 것 없이 강의 요청이 들어오지 않았다. 성심여대와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은가. 뒷날 서원대에서 석좌교수로 2년 동안 강의할 때에도 이런 내 원칙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학생들 수준을 고려해 강의를 쉽게 하고 문제도 단순하게 내주었을 뿐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처음에는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으나 나중엔 학점이 짜다는 평판을 들었다. 가끔 박사 논문 심사에 초빙되거나 문교부 연구 프로젝트를 심사하는 자리에서도 이런 내 태도 때문에 동료들이 골치를 앓았다.
나는 지금도 책이나 논문에서 표절 문제가 나오면 흥분해 마지않는다. 표절은 교수로서, 학자로서 가장 기본 덕목을 저버리는 행위 아닌가? 고위 관료들은 왜 출세를 위해 남의 글을 베껴 내는가? 나는 관리들이 부정을 저지르거나 아부를 일삼는 것보다 표절하는 행위를 더욱 나쁘게 여긴다. 또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보다 더 악질인 도둑이라고 치부한다.
그런가 하면 박사 논문이나 저술 또는 자서전마저 돈을 주고 사서 내는 부류들이 있다. 이른바 대필이다. 이는 표절보다 더 비양심적인 행위라고 본다. 이런 자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이 널려 있으며 최고 지도자의 자리를 누리고 있다.
역사학자
강의실에 들어가니 학생들이 120여명쯤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외래강사의 수업으로는 처음으로 수강생이 그렇게 많았다고 한다. 너무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출석은 부르지 않기로 하고, 근대사 강의 순서와 참고 목록을 적어준 뒤 신이 나서 열강을 했다. 그런데 한 학기를 다 마치는 동안 최 교수밖에는 말을 섞은 교수도 없었고, 안면을 트는 회식 자리도 한번 없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불거졌다. 첫 시험을 보고 나서 채점을 하는데, 어찌된 노릇인지 잘 쓴 답안지일수록 기존 논문을 표절했다. 또 나중에 낸 보고서는 거의 신용하 교수 등의 논문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그래서 그런 답안지는 모두 에프(F)로 처리했다. 그랬더니 ‘난리’가 났다. 최 교수는 내게 조금 사정을 하다가 통하지 않자 당사자인 학생들에게 청탁을 넣든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다. 해당 학생들은 내가 만나주지도 않자 집으로 뻔질나게 전화를 해대면서 “삼성에 취업을 하는데 에프 학점 성적표를 내면 들어갈 수 없다”는 따위의 말을 하면서 통사정을 했다. 하지만 나는 “답안지부터 표절을 하면 사회활동을 하면서 무슨 짓을 하겠나”라고 타이르면서 고쳐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훗날 들으니 학교 당국에서 적당히 처리했다고 한다. 그다음 학기에는 인기 정도나 강의 내용을 따질 것 없이 강의 요청이 들어오지 않았다. 성심여대와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은가. 뒷날 서원대에서 석좌교수로 2년 동안 강의할 때에도 이런 내 원칙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학생들 수준을 고려해 강의를 쉽게 하고 문제도 단순하게 내주었을 뿐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처음에는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으나 나중엔 학점이 짜다는 평판을 들었다. 가끔 박사 논문 심사에 초빙되거나 문교부 연구 프로젝트를 심사하는 자리에서도 이런 내 태도 때문에 동료들이 골치를 앓았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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