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제연구소 출범 때부터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고 리영희 선생이 99년 신년 하례식에서 덕담을 하고 있다.(왼쪽) ‘역문연’ 창립을 주도하고 2대 이사장을 지낸 원경 스님(당시 신륵사 주지)이 한 뒤풀이 고사에서 고 이균영 교수와 함께 잔을 올리고 있다.(오른쪽)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46
역사문제연구소는 1986년 8월2일부터 2박3일 일정으로 경춘선 언저리에 있는 강촌에서 첫 하계수련회를 열었다. 민박집에서 벌어진 이 모임에는 원경 스님, 임헌영 부소장, 천희상 사무국장 등을 비롯한 역문연 관계자는 물론 임진택(판소리 연구가)·송우혜(소설가)·이남희(소설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57명이 참여했으니 조용할 턱이 없었다. 때로는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누구는 다툼도 벌였으나 동지적 관계를 확인하는 모임이었다.
우리는 초기 6개월 동안의 연구소 활동을 정리·분석하고 앞으로의 계획과 연구 활동과 방향을 토론했다. 험난한 시대에 구성원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이기도 했으나 연구소의 내실화에 대해 많은 의견이 쏟아졌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 응일이를 여기에 데리고 갔다. 내 생각으로는 이 아이가 성장하면서 이런 어른들의 모임에 참여해서 의식을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응일이는 화장실이 재래식이어서 이틀이나 똥을 누지 못하면서도 더듬거리는 말로 자기소개를 하기도 하고 어른들 속에서 귀여움을 받으면서 마냥 즐거워했다.
이듬해 87년 여름 수련회는 안동의 가톨릭농민회관에서 벌였다. 한창 6월항쟁이 벌어질 무렵이어서 참석한 인사들은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첫 수련회와는 달리 역사학이나 사회과학 전공자들이 주로 참여했다. 특히 대구에서 신동근·유영철 교수 등이 참석해 민주화운동이 침체한 편이었던 대구에서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때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김동춘이 한국 사회를 진단하는 발표를 해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농민회관이 시내 외곽인데다 관리하는 수녀들도 우리 모임에 대해 이해를 많이 해줘 눈치 보지 않고 토론할 수 있어서 좋았다.
88년 하계수련회는 원경 스님이 주지로 있는 여주 신륵사에서 벌였다. 이 모임에는 미국에서 돌아온 정석종 소장을 비롯해 서중석·박원순·이균영 등 역문연 임원, 리영희·김낙중·송건호 등 자문위원, 반병률·한상구·윤해동·임대식·김귀옥·김정인 등 소장 연구자, 박원순 변호사 부부와 박용일 변호사 등 70여명이 참석했다. 지난 수련회보다 인원이 훨씬 많았고 열기도 그만큼 뜨거웠다. 그래서인지 여러 명의 경찰이 감시의 눈을 번뜩였다. 하지만 이미 익숙한 상황이어서 모두들 위축되지도 않았다.
리영희 선생은 ‘남북한 군사력 비교’를 주제로 강연을 했다. 리 선생은, 북한의 군사력을 총괄해 설명한 다음 특히 해군력은 동쪽과 서쪽으로 분산되어 있어서 남쪽보다 훨씬 열악하다는 논지를 폈다. 경찰은 강연장 바깥에서 힐금힐금하면서 열심히 메모하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역사기행에서 늘 하던 대로 ‘한강의 역사’, 특히 한강을 중심으로 전개된 민중운동에 대해 강연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동지들이었던 서양갑·박응서 등 일곱 서자가 이곳 여주 한강변에 둥지를 틀고, 인근 문경새재 일대에서 반역을 도모하다 잡혀 죽은 역사적 배경을 설명했다. 뒤풀이는 절 앞 한강변 모래밭에서 벌어졌다. 원경 스님은 대범한 분이어서 맥주·소주를 모래밭에 늘어놓았고 공양주들은 우리를 정성껏 접대했다. 남녀노소 모두 어울려 강강술래 놀이를 벌이니 한판 공동체였다. 정석종 소장은 어찌나 신나게 놀았는지 귀중한 시계를 모래 속에 잃어버렸는데 뒤에 원경 스님이 모래를 모조리 파내 찾아주기도 했다.
이 모임은 뒷얘기도 많이 남겼다. 임대식·김정인은 이때 눈이 맞아 결혼을 했으니 최초의 역문연 커플이 태어났다. 또 김귀옥(한성대 교수)은 훗날 4·19 연구소의 발표회 등에서 자신의 연구나 성장에서 잊을 수 없는 수련회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아무튼 역문연은 이렇게 3~4년을 보내면서 <해방 3년사>나 <한국근대사연구입문> 등을 성과물로 펴내서 학계와 대중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또 역사기행 등으로 대중화에 기여하기도 했으며 <역사비평>의 발행으로 근현대사의 정립과 새로운 평가라는 업적을 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신군부의 정보기관으로부터 끊임없는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편 이 무렵 소장 연구자들 중심으로 한국역사연구회가 발족되어 한국사를 집중적으로 공동 연구했고 망원연구실은 뒤에 구로역사연구소, 한국역사학연구소로 개편하면서 꾸준하게 역사 학술 활동을 벌였다. 이들 역사 연구 단체는 기존의 역사학회와 진단학회 그리고 한국사연구회와는 다른 구실을 하면서 역사 대중화에 기여했던 것이다. 이 시기, 한국사를 한 단계 진전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 모임은 뒷얘기도 많이 남겼다. 임대식·김정인은 이때 눈이 맞아 결혼을 했으니 최초의 역문연 커플이 태어났다. 또 김귀옥(한성대 교수)은 훗날 4·19 연구소의 발표회 등에서 자신의 연구나 성장에서 잊을 수 없는 수련회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아무튼 역문연은 이렇게 3~4년을 보내면서 <해방 3년사>나 <한국근대사연구입문> 등을 성과물로 펴내서 학계와 대중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또 역사기행 등으로 대중화에 기여하기도 했으며 <역사비평>의 발행으로 근현대사의 정립과 새로운 평가라는 업적을 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신군부의 정보기관으로부터 끊임없는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이화 역사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