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2월 풀빛출판사 사장 나병식(왼쪽)씨와 편집책임자 김명인씨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한국민중사>(오른쪽) 필화사건은 시민사회와 역사학계에 ‘민중사관’을 둘러싸고 대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6월항쟁 덕분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던 나씨(풀빛미디어 회장)는 현재 암 투병 중이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47
1980년대 중반 역사문제연구소의 다양한 활동이 정보당국의 주시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도 일상을 옥죄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광주의 민권변호사인 홍남순 선생은 한문서당 제자인 이희주의 시아버지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이후 광주에 내려갈 때면 어김없이 찾아가 인사를 드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많은 시국 얘기를 나누었다. 또 그분은 한문에도 상당히 소양이 있어서 직접 모은 추사의 간찰이나 글씨를 보여주면서 자랑도 했다.
80년 초, 홍 선생이 윤보선 전 대통령 등과 시국선언을 준비하다가 경찰이 들이닥치자 몸을 피해 이희주의 인도로 아치울 우리집으로 피난을 온 적이 있었다. 우리 부부는 홍 선생을 안심시키고 편안하게 지내시라고 2층 서재를 내드렸다. 1주일 정도 도피살이를 하는 동안 나는 시내 나들이를 하면서 동정을 살폈고, 아내는 틈틈이 홍 선생을 모시고 한강에 나가 함께 뱃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때에는 이웃들도 눈치를 채지 못했고 경찰들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86년 여름 ‘5·3 인천 노동자 시위’를 주도한 황광우가 우리집으로 도피해 왔을 때에는 사정이 달랐다.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이민우는 전두환과 만나 직선제 개헌 문제를 두고 타협을 시도하면서 과격한 학생운동세력과 결별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어 5월3일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의 경기·인천지부 결성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국에서 모인 사회단체와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여 현판식은 무산되었다. 이날 시위는 매우 격렬해 장기표 등 10여명이 수배를 당했고 129명이 구속되었다. 황광우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가 형인 황승우의 소개로 교외에 있는 우리집으로 온 것이었다. 그는 며칠 묵었다가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그가 떠난 며칠 뒤 광명경찰서 형사들이 아치울 마을의 길목을 지키더니 우리집을 포위하며 들이닥쳤다. 나는 서재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아내가 이들을 맞상대했는데, 그러다 경찰이 들고 온 서류에 우리집 전화를 도청한 기록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특히 나와 황승우가 나눈 대화 내용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형사들은 한참 어르다 황광우가 없음을 확인한 뒤 돌아갔으나 우리는 전화가 도청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흥분했다. 아내는 구리전화국에 가서 소리를 지르며 항의도 해봤으나 직원들은 묵묵부답이었다고 했다. 그 뒤 잠시 도청을 하지 않는 듯했으나 다시 소화기에서 찍찍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도청을 당하게 되면 통화감이 확연히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실은 ‘역문연’ 출범에 참여한 뒤부터 전화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도청 기미가 느껴지거나 특히 술이 취했을 때면 수화기를 들고 “안기부장 나와”, “경찰청장 나와”, “도청을 계속하면 너희들 가만 내버려두지 않아” 따위의 말을 토해내곤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집만이 아니라 한길사나 역문연 쪽도 도청을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단순히 사무실만이 아니라 주변 관련자들도 도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 행동이 위축될 턱은 없었다.
이 무렵 임헌영 부소장은 역문연 식구들을 데리고 가끔 산행을 했다. 아차산 산행에는 역문연 식구와 양심수를 후원하는 권오헌 등 20여명이 함께 능선을 따라 올랐다가 우리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었다. 그때 일행의 한 젊은이는 우리집을 둘러보더니 “숨어 지내기 좋은 곳”이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또 하나 <한국민중사> 필화사건이 터졌다. 87년 2월 풀빛출판사의 나병식 사장과 김명인이 편집을 맡아 두 권으로 펴낸 책이다. 필자는 윤대원·도진순 등 소장학자들이었다. 그런데 검찰에서는 유물사관에 입각해서 민중사를 서술해 헌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를 내세워 나 사장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해 재판에 회부했다. 첫 공판이 열린 5월18일 방청을 간 나는 오랏줄에 묶인 나 사장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삼켰다. 이 재판은 역사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변론은 한승헌·조영래·박원순 등이 맡았고, 증인으로는 정창렬·강만길·김진균 등 교수들이 나섰다. 증인들은 학문의 자유와 역사 서술의 자유를 주장했고, 검사들은 헌법 또는 실증법 위반으로 몰아붙이며 열띤 공방을 벌였다. 그런데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 돌발변수가 발생했다. 6월항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자 기세등등하던 검사들은 돌연 유화 제스처를 쓰며 아부하는 행동을 보였단다. 두달 뒤 나병식과 김명인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결과는 이렇게 싱겁게 끝났지만 역사학계로서는 커다란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해 9월 계간 <역사비평> 창간호에 관련 사실을 발췌해 부록으로 실어서 그 실상을 공개했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 무렵 임헌영 부소장은 역문연 식구들을 데리고 가끔 산행을 했다. 아차산 산행에는 역문연 식구와 양심수를 후원하는 권오헌 등 20여명이 함께 능선을 따라 올랐다가 우리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었다. 그때 일행의 한 젊은이는 우리집을 둘러보더니 “숨어 지내기 좋은 곳”이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또 하나 <한국민중사> 필화사건이 터졌다. 87년 2월 풀빛출판사의 나병식 사장과 김명인이 편집을 맡아 두 권으로 펴낸 책이다. 필자는 윤대원·도진순 등 소장학자들이었다. 그런데 검찰에서는 유물사관에 입각해서 민중사를 서술해 헌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를 내세워 나 사장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해 재판에 회부했다. 첫 공판이 열린 5월18일 방청을 간 나는 오랏줄에 묶인 나 사장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삼켰다. 이 재판은 역사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변론은 한승헌·조영래·박원순 등이 맡았고, 증인으로는 정창렬·강만길·김진균 등 교수들이 나섰다. 증인들은 학문의 자유와 역사 서술의 자유를 주장했고, 검사들은 헌법 또는 실증법 위반으로 몰아붙이며 열띤 공방을 벌였다. 그런데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 돌발변수가 발생했다. 6월항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자 기세등등하던 검사들은 돌연 유화 제스처를 쓰며 아부하는 행동을 보였단다. 두달 뒤 나병식과 김명인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결과는 이렇게 싱겁게 끝났지만 역사학계로서는 커다란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해 9월 계간 <역사비평> 창간호에 관련 사실을 발췌해 부록으로 실어서 그 실상을 공개했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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