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3월30일 서울 정동 옛 세실레스토랑에서 전국연합·민예총·민족문학작가회의·제주사회문제협의회 등 10여개 단체가 ‘4·3 제주민중항쟁 44주기 추모제 공동준비위원회’ 이름으로 추모기간 선포식을 열고 있다. 오른쪽부터 강창일 당시 배재대 교수, 고희범 전 한겨레신문사 대표, 김창후 제주4·3연구소장, 작가 현기영씨, 고 정윤형 교수 등이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50
1987년 9월 비정기간행물(무크지)로 창간된 <역사비평>의 원고료는 초기 젊은 강사급에게만 조금 지급됐고, 중견 이상은 봉사하는 마음으로 받지 않았다. 초기의 필자 대부분은 일종의 ‘운동’ 차원에서 글을 써냈던 것이다. 이렇게 어렵게 출발했지만 반응은 아주 좋아 이듬해 2월부터 계간지로 정착했다.
‘역문연’ 식구들과 편집진은 독자를 모집하는 데 앞장섰고 역사기행이나 역사강좌 때도 열성으로 홍보했다. ‘역사비평’은 역문연이나 진보학계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내용이나 문체 등 몇가지 문제를 안고 있어서 역사 대중화에는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는지 반성할 부분도 있었다.
‘역사비평’의 초대 대표를 맡은 원혜영은 1년쯤 뒤 정치권으로 진출하면서 자리를 내놓았다. 정치인을 대표로 두기에는 이미지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후 출간 경비 대부분을 박원순 이사장이 맡았다가 88년 말부터는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의 독지가인 장두환 사장이 발행인으로 경영을 맡고 역문연 소장이 편집인을 겸하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서중석 교수는 오랫동안 ‘역사비평’의 주간으로서 헌신적으로 일을 했다. 그는 주제를 정하고 내용을 검토하고 편집위원들과 의견을 나누면서 좋은 잡지를 만들려고 힘써왔다. 더욱이 현안을 다루는 시론 성격의 권두사를 도맡아 집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원고료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 뒤 임대식·김성보 등이 열성적으로 주간을 이어오면서 오늘날까지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발행될 수 있었다.
‘역사비평’은 역문연과 연계해 여러 연구활동도 전개했다. 그즈음 당시 배재대 교수였던 강창일(현 민주당 의원)·고희범(전 한겨레신문사 대표) 등 제주도 출신 인사들이 제주 4·3 항쟁의 실상과 대량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88년 4월3일 여의도에 있는 여성백인회관 강당에서 제주사회문제협의회 주최로 ‘제주도 현대사의 재조명’이란 주제를 내걸고 발표회를 했다. 주제 발표자는 박명림, 토론자로는 김남식·김광식 등이 나섰고, 나는 역문연을 대표해서 인사말을 하고 뒤풀이에도 어울렸다.
그때로서는 많은 청중이 참여했고 발표자나 토론자나 청중 모두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87년 9월 발족한 제주사회문제협의회 역시 6월항쟁의 흐름 속에서 ‘4·3’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할 신호를 보낸 것이다. 이 자리에서 모든 진행을 맡고 있는 강창일 교수는 내게 거듭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당시만 해도 제주도 출신이 아닌 사람들은 대부분 ‘4·3’을 두고 ‘빨갱이들이 벌인 폭동’이란 편견으로 참여하기를 꺼리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강 교수와의 인연도 새삼 떠오른다. 내가 서울대 규장각에서 일할 때 강 교수는 재적상태로 아세아문화사에서 한국사 자료 정리를 맡고 있었다. 그때 <임진왜란 관계문헌 총간>이란 사료집을 냈는데, 편집위원 제안을 받은 김용섭 교수가 나를 대신 추천했다. 그래서 이우성·임형택 교수와 함께 참여하게 된 나는 강 교수와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둘 다 술꾼이어서 즐겨 대작을 했다.
아무튼 이 발표회를 계기로 서울에서도 4·3 항쟁 복권운동이 전개되었고 92년 4·3 진상규명 범국민대책회의가 발족했을 때 나도 공동대표로 이름을 올렸다. 이어 뒷날 관련 특별법이 통과되고 제주에서 합동위령제가 열리는 과정에서는 역문연을 대표해서 김정기 소장과 서중석 부소장이 위원으로 참여해왔다. 나도 4·3 연구소 등에 직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그 뒤에도 나와 강 교수는 동학농민전쟁이나 동아시아국제평화인권회의 또는 과거사 단체와 같은 모임에서 자주 어울리고 있다. 성실한 역사학도였던 그는 17대 때부터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친일파 문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문제, 식민지 청산 문제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등 과거사 관련 입법 또는 기구의 구성 등에 큰 활약을 하고 있으니 역사학도가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학자
그 뒤에도 나와 강 교수는 동학농민전쟁이나 동아시아국제평화인권회의 또는 과거사 단체와 같은 모임에서 자주 어울리고 있다. 성실한 역사학도였던 그는 17대 때부터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친일파 문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문제, 식민지 청산 문제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등 과거사 관련 입법 또는 기구의 구성 등에 큰 활약을 하고 있으니 역사학도가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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