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7월 항일 조선의용군의 근거지였던 태항산 답사에 나선 필자는 첫 관문인 한단에서 진기노예열사능원에 있는 진광화 열사의 전시용 가묘를 참배했다. 본명은 김창화로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인 진 열사는 중국 팔로군에 가담해 태항산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65
1991년 7월21일 통역 겸 보호자로 연변 출신의 젊은이 김명헌과 함께 나는 태항산(太行山·타이항산)으로 향했다. 중국 서쪽의 태항산은 조선독립동맹과 그 산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군의 마지막 항일근거지가 아닌가? 먼저 간단하게 이들의 활동을 소개해보자.
의열단 활동을 지휘했던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항일활동을 벌였다. 1938년 김원봉의 노선에 반기를 든 최창익 등이 의용대 일부 병력을 이끌고 마오쩌둥이 근거지로 삼고 있던 연안 쪽으로 올라갔다. 42년 김두봉·무정 등이 이곳의 여러 조직을 발전적으로 개편해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그 산하에 군정학교를 세워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확대·개편해 군사조직으로 삼았다.
조선의용군의 첫 근거지가 바로 태항산 일대였다. 이곳에서 400여명이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최후까지 팔로군의 지원을 받으며 유격활동을 펼쳤던 것이다. 이들 의용군은 처음에는 전선에 참가해 전투를 벌였는데 연길에서 만났던 작가 김학철이 바로 이 전투지역에서 다리 부상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자 팔로군에서는 의용군들의 희생이 크다고 해서 보호 차원에서 선무공작만을 벌이게 했다. 일본군에 있던 조선 학도병들도 속속 투항해 왔는데 연길에 사는 유동호도 투항해서 의용군 통역병으로 활동했다.
의용군은 이 지역을 야금야금 점령해오는 일본군을 향해 성능 좋은 마이크로 “당신들은 왜 이곳에서 고생하는가? 부모·처자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라”거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총알받이로 왜 목숨을 바쳐야 하나?”라고 외치고 전단지를 살포하는 등 선무공작을 담당했다. 전선이 격화하자 안전지대인 연안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이들의 존재와 활동 상황은 남과 북, 양쪽 모두 독립운동사에서 완전히 누락시키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해방 뒤 북쪽으로 들어갔으나 김일성 노선에 반대해 연안파로 몰려 숙청을 당했고 남쪽의 반공정부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외면했다. 그 정치적 이유나 이데올로기는 어떻든 간에 민족사의 일부라는 생각에 나는 이곳을 먼저 답사하기로 작정했다. 그곳 사정에 대해서는 이미 연길에 사시는 유동호에게서 상세히 들은 참이었다.
그날도 무척 찌는 날씨였다. 나는 일단 한단(邯鄲)으로 가서 태항산 지구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한단까지 가는 기차표는 이미 매진되었고 그 뒤의 예약도 기약할 수가 없었다. 김명헌은 아침부터 베이징역을 서성이다가 중간지점인 석가장(스자좡)까지 가는 차표를 구했다. 누군가 사정이 생겨 물리는 표를 구한 것이다. 저녁 7시25분발 시안행 열차는 당시 중국에서는 초특급이었지만 자리가 없어서 내내 서서 갔다. 차 안에서 역무원과 다시 교섭을 벌여 한단행 표를 구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무려 7시간 정도를 달려 이튿날 새벽에야 한단역에 내렸다.
옛 조나라의 수도였던 한단은 인구 100여만명의 깨끗한 도시였다. 어릴 적 <통감>을 읽으며 ‘한단’의 음을 익히는 데 애를 먹은 기억이 나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침에 빈관 앞에서 택시를 잡으려 하니 도통 차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오토바이에 마차 모양을 얹은, 택시도 아니요 마차도 아닌 ‘오토바이 마차’를 타고 열사능원으로 달렸다. 그곳에는 팔로군 휘하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희생당한 진광화 열사의 가묘가 있다.
평안도 출신인 진 열사의 묘는 팔로군 사령관이었던 좌권 장군의 묘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옆에는 그의 내력을 새긴 동판이 서 있었다. 우리는 경건하게 참배하고 발길을 돌렸다. 다시 돌아보니 열사능원은 87년 건립됐는데 탑이 거대하고 조각들이 제법 정교했다. 우리는 서둘러 한단역으로 나왔다. 태항산 산악지구를 가려면 그 들머리인 섭현을 거쳐야 했다. 어렵사리 섭현행 완행열차 표를 끊었다. 섭현은 한단에서 100㎞ 거리에 있었다.
한단을 벗어나자 구릉과 분지가 이어졌고 계단식 밭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한 시간쯤 달리자 자산참역에 도착했는데 여기서부터 ‘태항산 지구’라 했다. 태항산은 하나의 높은 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하게 뻗어 있는 산줄기를 일컫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태항산’은 ‘크게 줄을 선 산’이라는 뜻임을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한단을 벗어나자 구릉과 분지가 이어졌고 계단식 밭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한 시간쯤 달리자 자산참역에 도착했는데 여기서부터 ‘태항산 지구’라 했다. 태항산은 하나의 높은 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하게 뻗어 있는 산줄기를 일컫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태항산’은 ‘크게 줄을 선 산’이라는 뜻임을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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