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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찾아서] 공안 따돌리느라 소나기땀 흘리며 ‘유적지’ 겨우 도착

등록 2011-01-12 10:53

1991년 여름 두번째 중국기행에 나선 필자는 일제 말기 항일 조선의용군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산시성 태항산(사진) 지구를 처음 답사했다. 태항산 일대는 당시 미개방 지역이자 남한 쪽에서는 접근한 사례가 거의 없던 미답지였다.
1991년 여름 두번째 중국기행에 나선 필자는 일제 말기 항일 조선의용군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산시성 태항산(사진) 지구를 처음 답사했다. 태항산 일대는 당시 미개방 지역이자 남한 쪽에서는 접근한 사례가 거의 없던 미답지였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66
태항산 답사를 위해 한단에서 출발한 완행열차를 탄 지 3시간 만에 섭현역에 내렸다. 그런데 역 앞인데도 택시 한 대 보이지 않았고 언덕바지 길도 비포장이었다. 그야말로 첩첩산골이었다. 다만 한단에서 탔던 ‘오토바이 마차’가 호객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일단 ‘오토바이 마차’를 타고 초대소로 들어갔다. 이곳에는 외부 손님을 재우고 접대하는 초대소가 두 곳뿐이라 했다.

우리는 현 인민정부와 가까운 초대소에 들었는데 지저분한 곳이기는 했으나 꽤 넓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곧바로 다시 나와 택시를 찾아보았으나 역시나 보이지 않았고 ‘오토바이 마차’마저 눈에 띄지 않았다.

김명헌이 현 인민정부에 가서 차편 협조를 구해보자고 했다. 나는 어딘가 찜찜했지만 그를 따라 현 인민정부 판공실로 들어갔다. 판공실의 복무원은 내 여권과 김군의 신분증명서를 보여달라고 했고 이리저리 전화 연락을 하더니 한단 외사과에서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현청사를 나오자, 젊은 복무원이 뒤따라 나와 자신이 우리를 보호하는 책임을 맡았다고 하면서 동행을 요구했다. 어딘지 심상치 않았다.

그 복무원과 초대소에 도착하니 곧바로 현 공안부의 공안원 둘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우리에게 “왜 이곳에 왔느냐” “이곳은 미개방지구인데 여행증명을 떼왔느냐”는 따위의 심문을 시작했다. 또 우리 여권과 신분증명서를 일시 보관한다며 거두었다. 나는 순간 “아차, 잘못되었구나” 하고 느꼈다. 그런데 김군은 우리를 보호하느라 그렇다느니, 우리의 편리를 봐주기 위한 절차라느니 하며 별일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 물정을 모르는 듯했다.

나는 김군을 통해 그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벌써 저녁 7시가 넘었는데 이 시간이 넘으면 식당도 문을 닫는다. 처음 우리를 따라왔던 젊은 복무원이 교섭을 벌여 5인분의 식사를 준비시켰다. 우리의 권고에 따라 그들도 식탁에 함께 앉았다. 나는 좋은 술과 음식을 주문하라고 김군에게 일렀다. 그야말로 귀빈실에서 뻑적지근한 상을 벌였다. 우리는 음식과 술을 나눠 들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음식값이 약간 마음에 걸렸는데 계산서를 보니 160원이었다.(당시 우리돈으로 2만3000원 정도) 그만한 성찬을 서울에서 먹으려면 10만원이 넘게 나왔을 것이다. 여행 경비를 우선 쓸 만큼만 계산해서 챙기고 나머지는 한국선 선생 부인인 김채옥 여사에게 맡겨두고 온 걸 후회했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니, 공안원 한 명이 우리를 보호한다며 앞방에서 잔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한단의 외사과장이 왔고 현 공안국장 그리고 담당관 등이 회의를 거쳐 평결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담당 과장이, 일테면 처음 쓴 조서를 들고 계속 의문점에 대해 수정하느라고 다섯 차례나 우리 숙소를 왕래했다. 우리를 직접 불러 심문하지 않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렇게 또 하루를 보냈다. 담당관이 마지막 왔을 때 나는 강력하게 항의했다. “갈 길이 바쁜 사람들이니 무슨 평결이든 빨리 내려야 할 것 아니냐?” “우리가 여기에 도둑질하러 왔겠느냐? 중국혁명의 역사유적을 찾으러 왔다” 따위의 말을 했다. 그는 내 말을 잘 전하겠노라고 했다.

저녁식사를 하고 나니, 마침 앞방에서 우리를 지키던 공안원이 없었다. 우리는 카메라를 주머니에 넣고 시내 산책을 하는 척하면서 초대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잰걸음으로 2㎞쯤 떨어져 있는 하남점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긴 다리를 건널 즈음에는 등에 소나기 같은 땀이 흘렀다. 해거름쯤 동네에 들어선 우리는 동네사람들에게 조선의용군의 유적을 물었다. 그 가운데 62살 된 복중림이란 노인은 조선의용군이 경영한 방직공장·병원·상점 등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리 잘 아느냐”고 물으니 어릴 적부터 장돌뱅이 노릇을 하며 조선의용군과 함께 어울리기도 하고 심부름을 다니기도 했단다.

직조공장은 흙집 2층으로 당시 하남점 인민법정 안에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병원은 하남점 위생원 건물로 쓰고 있었다. 나는 자동사진기를 계속 눌러댔으나 어둑한 밤이어서 현상이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았다. 위생원에 근무하는 사욱련(34)이란 여성은 그곳 출신이 아닌데도 위생원이 조선의용군의 병원 자리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반기며 차를 권했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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