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부터 해방 무렵까지 조선의용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태항산 일대, 허베이성 섭현의 하남점 남장촌에 남아 있는 조선혁명군정학교 설립자이자 교장 김무정 장군과 학생들의 숙소 건물.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67
1991년 여름 당시까지도 한단 하남점의 주민들은 조선의용군이 약품을 구해 와서 주민들을 치료해주고 생업을 도와준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곳이 예전 그대로 잘 보존된 것은 전혀 개발이 되지 않은 덕분이었다. 중국 당국에서 미개방 지역으로 지정하고 외국인의 출입을 막는 까닭을 알 만도 했다. 나는 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발길을 돌려 숙소로 오니 공안원 두 사람이 대기하고 있다가 ‘어디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갑갑해 견딜 수가 없어 시내 산책 좀 하고 왔지”라고 대답했다. 이날 밤도 두 공안원이 우리를 지키느라 앞방에서 잤다.
다음날 오전 10시쯤 한단 현공안국으로 나오라는 전갈이 왔다. 짐을 모두 챙기고 초대소 숙비 계산도 끝내고 오라 하니, 이제 평결이 났구나 생각했다. 공안국에 들어서자 외사과장·공안국장·담당관 등 5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인사도 없이 앉아서 나를 맞이했다. 외사과장은 거만을 부리고 있었고 공안국장이 평결문을 낭독했다. “무단히 정부의 허가도 없이 미개방 지구에 들어왔다. 그러나 동기가 불순하지 않으니 ○○법 ○○조에 의해 관대한 처분을 내리기로 평결했다. 벌금은 인민폐 100위안. 벌금을 문 뒤 즉시 떠나라. 이의가 있으면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 대개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이의가 없다고 대답했다. 이어 벌금을 물고 영수증과 여권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나도 거물처럼 점잔을 빼면서 “내가 미개방 지역에 허가 없이 들어온 것은 사정을 잘 모른 탓이었다. 미안하다. 그러나 평결이 너무 늦어 바쁜 여행에 지장이 많다. 앞으로 두 나라의 우호를 위해 잘 지내자”고 제법 엄숙하게 말했다. 그들은 역사문제연구소가 서울에 있느냐 지방에 있느냐고 물어서 명함에 쓰인 대로 ‘중앙단위’라고 하자 태도가 싹 달라졌다. 바로 중국에는 사설(민간) 연구소가 없으니 서울에 있다는 것만으로 나를 장관급의 소장이라 여긴 것이다.
이어 그들과 정중하게 악수를 했는데 거만을 부리던 외사과장도 일어서서 ‘장관급’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우리를 데리고 버스정류장으로 안내한 담당 과장에게 나는 ‘우리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며 아이들 선물이라도 사주라고 50위안을 건네주었다. 이때에야 나는 김군의 말만 믿고 미리 뇌물을 찔러주지 않은 걸 후회했다. 그는 겉으로는 받지 않으려 했으나 “조선 사람은 이렇게 예의를 표한다”고 재차 말하자, 마지못한 듯 받았다.
담당 과장이 사라진 뒤 우리는 비가 궂게 내리는 속에서 재빨리 버스에서 내려 미리 보아둔 ‘오토바이 마차’를 타고 다시 조선의용군 근거지인 곡원촌으로 달렸다. 그러나 비가 억수로 쏟아져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모험은 이 정도로 그치기로 하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내가 여행 허가를 받지 않은 것은 잘못이지만 허가 신청을 해봐야 빨라도 사나흘씩 걸리니 바쁜 일정에 일일이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었다. 실수의 연발이었으나 좋은 경험을 했다. 아마도 한국전쟁 이후 한국인으로 맨 처음 태항산 지구로 들어가 불완전하나마 답사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나는 다른 미개방 지구도 이런 식으로 눈치껏 돌아다녔다.
허베이성 한단에서 서쪽 방향인 산시(섬서)성의 성도 시안(서안·장안)으로 가는 길은 그래도 순조로웠다. 고대 도시인 시안은 베이징 못지않게 볼거리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걸 보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내가 부리나케 찾아간 곳은 시안역 앞에 있는 산시성의 노간부 휴양소였다. 그곳에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태항산과 옌안(연안)과 시안에서 활동했던 서휘가 머물고 있었다. 그는 해방 뒤 북한으로 건너가 조선노동당 부위원장, 여성동맹 위원장 등 고위직을 지냈다. 그러나 1956년 김일성 개인숭배를 반대한 이른바 ‘8월 종파사건’ 때 연안파로 몰려 중국으로 망명해 시안에서 살고 있었다.
휴양소 관리인은 그가 퇴근했으니 내일 오라고 했고 그래서 명함을 건네주고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날 찾아가니 그런 사람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은둔하고 있는 처지여서 사람을 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를 찾아간 것은 김일성 얘기를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독립동맹과 의용군에 대한 증언을 들으려 한 것이었다. 기대를 걸고 왔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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