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991년 여름 옌안 답사에서 광주 출신으로 ‘중국인민해방군가’(팔로군행진곡)를 작곡한 정율성(왼쪽 둘째)이 ‘옌안송’을 만든 유적지를 둘러보고 국내에 소개했다. 정율성은 2009년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으로 뽑힐 정도로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68
시안에서 두번째 방문지는 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팔로주섬판사처(八路駐陝辦事處) 기념관이었다. 이곳은 국민당 정부와 맞서 투쟁을 벌이고 또 국민당과 합작으로 일본군에 저항하면서 팔로군(홍군)을 지휘한 저우언라이·덩샤오핑 등이 사용한 아지트의 하나였다. 기념관 내부에는 당시에 쓰던 무선기 등 모든 기구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옌안송’이라 쓰인 걸개 앞에 섰다. 걸개에는 ‘옌안송’의 가사가 적혀 있었고 그 곁에는 ‘애국청년 작곡가 정율성’에 대한 간단한 약력이 적혀 있었다. ‘조선족 청년 정율성은 난징에 있다가 선협부의 도움을 받아 시안에 왔다. 그는 홍군의 군가를 많이 작곡했다. 팔로군 판사처를 거쳐 옌안으로 들어간 애국청년이다.’
나는 이미 연길에서 그에 관한 기록들을 수집해 놓았다. 이 기행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와서 그에 관한 약전을 써서 <사회평론>(92년)에 발표했는데 최초의 소개였지만 약간의 오류도 있었다.
정율성에 대해 좀더 소개해보자. 그는 1918년 광주 양림동 출신으로 처음 이름은 ‘부은’이었다.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중학교에 진학한 뒤 음악도의 꿈을 키우면서 이름을 ‘음악을 이룬다’는 뜻을 따서 ‘율성’(律成)으로 바꾸었다. 그즈음 그의 두 형은 국내에서 독립운동가로, 셋째 형과 누이는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셋째 형이 국내로 잠입했다가 돌아갈 때 따라간 그는 난징과 상하이 등지에서 항일단체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음악 공부에 열중했다.
37년 일제가 상하이를 점령한 데 이어 난징까지 위협하자 정율성은 다른 선배들과 함께 옌안으로 갔다. 이때 그의 나이 19살. 어느날 동료인 중국인 문학소녀 막야에게 옌안의 정서와 의지를 담은 가사를 써달라고 부탁했고 이 가사를 가지고 ‘옌안송’을 작곡했던 것이다. 이게 그의 첫 작품이었다. 그는 항일군정학교 강당에서 열린 발표회에서 중국인 여자가수와 함께 중창으로 이 곡을 처음 소개했다. 그 덕분에 그는 그 자리에 참석한 마오쩌둥의 격찬을 받았고 주더(주덕) 총사령관의 집에도 초대받았다. 그의 데뷔는 너무 화려해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연달아 군가·행진곡 등을 발표했다.
이 무렵 그는 팔로군 전사로 군정학교 대대장인 중국인 정설송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런데 신혼인데도 무정이 태항산 지구에서 항일활동을 벌이자 그곳으로 따라갔다. 마침 폐병에 걸려 냇물에서 잡은 물고기 피를 마시면서 영양을 보충해 살아났다. 이 시기 그의 민족혼이 살아났다. ‘조선의용군 행진곡’, ‘조국을 향해 나가자’ 등을 작사·작곡했다. ‘미나리 타령’은 이화림 작사, 정율성 작곡인데, 가사는 ‘미나리 미나리 돌미나리 태항산 골짜기의 돌미나리 한두 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찰찰 넘치누나…’였다. 이게 민족정서 아닌가? 이게 바로 ‘민족주의 리얼리즘’일 것이다. 그는 ‘노들강변’ ‘방아타령’ 등 우리의 민요를 조선의용군에게 가르쳤다.
해방된 뒤 북한에 가서 음악활동을 벌이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던 그는 한국전쟁 때 인민지원군의 악대를 이끌고 참전했다. 그는 이때 한강까지 내려왔으나, 그리고 그리던 고향의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는 베이징에서 다시 눈부신 음악활동을 벌여 600여곡을 남겼고 중국 공산당의 주요 행사 때마다 그의 음악이 연주되었다. 그는 때때로 연길의 동포들과 어울렸는데 많은 일화를 남기고 62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래서 그를 중국에서는 ‘3대 현대음악가’로 추앙하고 있으며 연변자치주에서는 ‘민족영웅’으로 받들고 있다. 우리는 그를 민족음악가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근래에 들어 광주에서는 그의 작품을 해마다 연주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하고 그의 고향을 찾아오는 중국 관광객도 많다고 한다.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그의 딸도 행사 때마다 광주에 온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출생지를 두고 광주 양림동설(유족 증언)과 불로동설(호적에 근거)로 갈라져 다툼질을 벌이고 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작은 ‘지역이기’ 탓인 모양이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