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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 찾아서]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선봉장’ 맡아 / 이이화

등록 2011-01-18 22:01수정 2011-01-19 09:26

필자는 ‘동학 100돌’을 5년 앞둔 1989년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발족시킨 동학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이하 백추위)의 위원장을 맡아 다양한 행사를 주관했다. 94년 10월 공주 우금치에서 열린 합동위령제에서 대표로 잔을 올리고 있는 필자.  역사문제연구소 제공
필자는 ‘동학 100돌’을 5년 앞둔 1989년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발족시킨 동학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이하 백추위)의 위원장을 맡아 다양한 행사를 주관했다. 94년 10월 공주 우금치에서 열린 합동위령제에서 대표로 잔을 올리고 있는 필자. 역사문제연구소 제공
이이화 - 민중사 헤쳐온 야인 71
1994년은 동학농민전쟁(또는 혁명)이 전개된 지 100돌이 되는 해였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는 5년 전인 89년 여러 기념사업을 벌이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두기로 결정했고 동학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이하 백추위)를 발족시켰다. 그 목적은 “동학농민전쟁의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을 밝히고 이에 기초해 역사인식의 대중화와 농민전쟁의 역사적 교훈을 실천하기 위해서”라고 내걸었고, 구체적 사업계획으로는 연구발표회, 연구 자료집과 사료집 발간 등 학술 출판사업과 대중강좌, 역사기행, 다큐멘터리 제작 지원 등을 설정했다.

이 기구를 발족시키면서 추진위원장에는 이이화, 연구위원 겸 담당 간사로는 신영우(충북대)·우윤·배항섭·김양식·박준성·왕현종·이승용 등을 두었고 사무간사는 장영희가 맡았다. 교수 또는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소장 전공자들인 이들 연구위원들이 일을 추진하는 핵심 구성원으로 학술과 기행과 강의 등을 분담해서 진행시켰다.

또 후원회에는 회장 한승헌 변호사와 회원 50여명이 참여해 후원금을 내기로 약속했다. 인병선(짚풀박물관장)·장두석(민족의학자)·황승우(교육자) 등은 일시불로 백만원 단위의 후원금을 내기도 했고 92년 7월부터 94년 12월까지 고순정(화가)·이광연(교사)·선왕주(의사)·정용식(변호사)·박석무(국회의원)·홍기훈(˝) 등은 한 달도 빼먹지 않고 꼬박 10만원씩 후원해 주었다. 한 회장은 전주지역 기념사업회 이사장도 맡고 있어서 후원금 대신 실제로 도움을 주는 일을 주선해 주기로 약속했다. 액수가 많고 적고를 가릴 것 없이 고마운 분들이었다.

백추위에서 단계적으로 벌인 실적과 행사를 말하기에 앞서, 그 전사(前史)를 조금 늘어놓기로 한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876년 강제로 조선을 개항시킨 이래 경제침탈을 일삼았고 이어 대륙 진출을 꾀하면서 우리나라 주권을 유린했다. 또 서구 열강들도 너도나도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어 이권을 앗아갔다. 더욱이 고종과 민비는 민씨 세도에 휘둘려 그들이 저지르는 부정과 비리를 외면한 채 간교한 꾀와 정쟁으로 나라를 경영하고 있었다.

마침 동학이 발생해 양반과 상놈을 가리지 않고 인간 평등을 외치며 외국 세력에 대한 저항감을 드러내면서 새로운 세상 곧 개벽을 내걸었다. 이에 소외받던 계층은 물론 쫓겨난 벼슬아치와 몰락한 양반과 수탈에 시달리고 있는 부자들도 동학 조직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동학 조직은 전국으로 뻗어나갔다. 그래서 당대 가장 큰 조직으로 성장한 것이다. 1890년대에 들어 동학 조직은 충청도의 해안지역과 호남지역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1890년대 초 첫째로 종교적 의미의 교조신원, 곧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는 요구가 일어났고, 둘째로 지배세력과 민씨 일파 등 세도가를 타도해야 한다는 외침이 일어났다. 이들이 집회를 벌일 적에는 수만명이 몰려들었다. 마침내 1894년 전봉준이 주도한 남접 농민세력이 먼저 봉기해서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를 점령하고 이어 농민통치라 할 집강소 활동을 벌였다. 이를 반봉건 운동이라 했다. 그즈음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폐위시킨 뒤 개화 정부를 수립한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와 맞붙어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그러자 농민군들은 준비를 거듭한 끝에 그해 9월 전면적 봉기에 나섰다. 이를 반침략 운동이라 부른다.


그러니 동학 농민군들은 처음에는 반봉건, 뒤에는 반침략에 나선 것이다. 농민군들이 대포와 기관총 앞에서 죽어 넘어질 때 기득권을 누리던 유림과 양반세력은 숨어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이때 죽은 농민군의 수를 두고 30만명이라고도 하고 5만여명이라고도 한다. 그 뒤 일제의 탄압으로 농민군들은 숨어 살아야 했고 ‘동학’이라는 대규모 민중봉기가 전국에 걸쳐 일어났었다는 사실조차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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