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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찾아서] 고시랑당산·자작고개…전국 곳곳 ‘희생의 기억’ / 이이화

등록 2011-01-24 19:32수정 2011-01-25 14:21

동학농민전쟁 백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필자가 1990년 9월 말 첫 동학 역사기행팀을 이끌고 강원도 홍천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에 면민들이 세운 동학군 전적 기념비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동학농민전쟁 백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필자가 1990년 9월 말 첫 동학 역사기행팀을 이끌고 강원도 홍천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에 면민들이 세운 동학군 전적 기념비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75
1990년대 초 동학농민전쟁 백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백추위)의 답사길을 이끌어준 향토사학자들을 좀더 소개해보자.

김제 원평의 새마을금고 이사장이기도 했던 최순식 선생은 모악향토문화연구회를 만들어 이 지역 구전설화와 자료를 수집해왔다. 그는 금산면 출신의 농민군 지도자인 김덕명과 김인배의 여러 유적지를 찾아내 소개했으며, 특히 전봉준의 외가가 김덕명의 집안인 언양김씨여서 이 인연으로 전봉준이 고창 당촌마을을 떠나 10대의 나이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는 증언을 찾아냈다.

또 원평장터를 흐르는 원평천 모래벌에서 1893년 원평집회를 열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집회 때는 나무를 얽어 단(무대)을 만들고, 꽹과리를 울리고 판소리를 해서 장군들을 모으고 난 뒤 지도자가 나와 연설했다고 한다. 그럴 때면 모래벌 언저리에 술 팔고 밥 파는 전(廛)도 벌어졌다고 한다. 또 공주에서 패전한 농민군이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대야마을 앞산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주민들이 그때 희생된 농민군의 무덤을 만들어주었다는 사실과 어릴 때 그 자신 앞산에서 탄피를 주운 적이 있다는 증언도 들려주었다.

고창문화원장으로 오래 재직한 이기화 선생은 당촌마을의 전봉준 생가 터와 그의 아버지 전창혁이 이 마을에서 서당을 연 자리를 일러주었다. 그는 당촌마을이 농민전쟁이 끝날 무렵 모조리 불에 탔다는 사실과 전봉준의 가계를 밝혀주는 자료인 <천안전씨 족보>를 발굴해 알려주기도 했다. 또 전봉준의 비서였던 정백현의 아들 정병묵과 손자 정남기(<연합통신> 해직기자 출신·언론재단 이사장)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또 이 일대 농민군 천인부대를 이끈 홍낙관이 서울 말씨를 썼다는 것과 그가 무당 아내를 두어서 천대를 받았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장흥에서는 문화원장을 지낸 강수의 선생의 안내를 받았다.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석대들과 당시 장흥부에서 농민군에 의해 죽음을 당한 벼슬아치들의 제향을 올리는 영회당 등을 소개해줬다. 이분은 사진 전문가여서 시기에 따라 유적지가 달라진 모습도 기록해 알려주었다.

진주에서는 진양문화원장인 김범수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농민군과 일본군이 전투를 벌인 하동 고성산 일대에서 수집한 증언을 알려주었다. 곧 수백명의 농민군이 몰살당해서 한 마을에서 한날한시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 비가 오면 귀신들이 고시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고성산을 ‘고시랑당산’이라 부른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예천 일대에서는 향토사연구회장인 정양수(대창고교 교감) 선생이 안내와 접대를 해주었다. 동학 당시 농민군을 공격하려 조직한 집강소가 관아의 객관에 있었는데 그 건물을 그대로 현재 대창고교로 옮겨온 사실과 농민군들이 집강소 두령들을 끌고 가서 한천 모래바탕에 묻어버린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지역 답사팀은 예천을 중심으로 상주·김천·선산 등지의 유적을 조사하고 답사해 많은 증언과 사료를 발굴한 내용으로 박사논문을 발표했던 신영우 교수가 이끌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홍천 풍암리에 사는 최주호(작고)는 전문가가 아닌 희생자의 아들로서 생생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집에서 앞을 바라보면 자작고개가 보이고 그 너머에는 진등이라 부르는 작은 등성이가 있다. 자작고개는 농민군의 피가 고개를 ‘자작자작’ 적실 정도로 고여 있었다 해서 마을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요, 진등은 농민군이 진을 친 등성이라는 내력이었다. 최주호는 어릴 때 할아버지의 얘기를 은밀하게 들으면서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 이곳에는 1971년 서석면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위령탑을 세웠는데 면민이 세운 유일한 위령탑이었다. 하지만 일부 향촌에서는 족보를 보이면서 양반 자랑을 늘어놓기도 하고, 돈을 내고 공명첩을 받은 것을 실제 벼슬살이를 한 것으로 알고 뽐내는 이들의 모습도 자주 보았다. 또 의병과 혼동하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이는 우리 연구자들이 풀어야 할 몫이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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