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2월13일 전북 정읍 이평면 장대리 전봉준 옛집에서 열린 동학농민전쟁(혁명) 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의 ‘다시 쓰는 사발통문’ 공표 행사에서 필자가 통문을 직접 쓰고 있다. 1893년 12월 고부 농민봉기 첫 결사를 알린 사발통문은 68년 12월 고부면 송준섭의 집 마루 밑에 묻힌 족보에서 발견되었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78
동학농민전쟁 백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백추위)를 비롯한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들은 ‘동학 100돌’을 앞두고 무엇보다 연구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작업에 주력했다. 1990년부터 94년에 걸쳐 5개년 계획으로 연구논문집을 내고자 준비를 서둘렀다. 독자들은 좀 지루하겠지만 이 과정을 요약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마침 한국역사연구회의 안병욱 회장은 역사비평사의 장두환 사장으로부터 연구비 지원을 약속받았다. 장 사장은 5년에 걸쳐 해마다 2000만원씩 지원하기로 했다. 애초 백추위에서도 연구논문집 간행을 계획했지만 경향이 같은 연구논문을 굳이 따로 낼 필요성이 없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연구 인력이 더 풍부한 한국역사연구회 주관으로 함께하기로 했다. 그래서 백추위에서는 배항섭 연구위원(고려대)이 대표로 참여했다.
이에 따라 해마다 주제를 정해 학술발표회도 열었다. 발표회는 한국역사연구회의 안병욱·이영호(인하대)·고석규(목포대) 등이 이끌었는데, 나는 주로 젊은 연구자들의 초벌 논문을 미리 읽고 사실 오류와 원문 해석의 오역을 검토하는, 일테면 교열을 맡아 했다.
발표회 때는 교수와 학생들은 물론 언론과 시민들도 물려 객석을 꽉꽉 메웠다. 토론도 진지했고 열기도 넘쳐났다. 필진 50여명이 집필해 해마다 한 권씩, 역사비평사에서 논문집도 차질없이 냈는데 그 제목에는 언제나 ‘1894년 농민전쟁’이란 접두사가 붙어 있었다. 우리가 많은 논의를 거친 끝에 동학이란 종교적 외피를 배제하고 농민운동의 성격을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용어를 합의한 결과였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간지 표기인 ‘갑오’를 배제해서 차별성을 보인 것이다. 한편 백추위의 연구위원들은 여러 학술발표회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여러 기념단체들이 벌인 발표회의 주제들이 미시적 분야를 포괄한 탓으로 아주 다양했고 그 범위도 일정 지역의 전개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봉기한 내용을 포괄해서 담고 있었다. 또 지역적 특성을 부각시키는 주제를 내걸기도 했다. 이들
발표회에는 시민들의 참석이 많아 역사 대중화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 무렵 북한에서도 100돌을 앞두고 <갑오농민전쟁 100돌 기념 논문집>을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에서 낸 적이 있다. 그곳 역사연구소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 주로 집필자로 참여했는데 원종규·박득중·허종호 등 12명이 집필을 맡았다. 북쪽 논문집에서는 ‘갑오농민전쟁’으로 표기를 했다. 그 역사적 배경과 동학의 발생을 전제로 내세우고 삼례·보은 봉기로부터 집강소 활동과 반일투쟁 그리고 그 역사적 교훈으로 나누어 담아냈다.
그런데 북쪽 논문집에서는 반봉건 반침략의 기저를 깔고 있었으나 연구 분야의 다양성이 부족하고 오류투성이인 오지영의 <동학사>를 많이 인용하는 등 사료의 미비로 인한 오류가 군데군데 보였다. 당시 백추위에서 수집·간행한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총 30책·1996년)가 북쪽에 전달되지 않아 참조할 수 없었던 것도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총서는 97년에 들어서야 사운연구소의 이종학 소장과 강만길 교수의 배려로 북에 전달할 수 있었다.
한편 유아무개 교수(고려대) 등 일부 학자들은 농민군의 폐정개혁을 보수개혁이라 보면서 변혁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는 등 ‘딴지’를 걸기도 했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갑오개혁을 근대개혁이라고 주장하면서 농민군의 개혁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를 보였다. 농민군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양반·상놈의 차별을 타파하려고 했는지, 목숨을 던져 항일전선에 뛰어들었는지에 대한 사료 검토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그 시대정신을 외면하고 있었다. 이들의 이런 인식이 뒷날 이승만을 국부로 떠받들며 재벌들에게 ‘국통’을 세워야 한다고 돈을 우려내는 식의 반역사적 활동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아닐까 싶다. 이들 계보를 잇는 후대의 아류를 역시 전봉준 등 지도부가 군주를 받드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비판했으며 집강소를 통한 농민 변혁운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승만을 근대화의 선구자,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으로 받드는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의 교수들은 이런 이론을 곧이곧대로 받아서, 한층 농민군의 변혁운동을 평가절하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계열에서 막대한 연구비를 끌어가고 있는 모양새도 참 의아스럽다.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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