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3월3일 당시 서울 충정로 동아일보사 사옥에 있던 동아클럽에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100년 만의 첫 모임’으로 동학 100돌 기념사업의 백미였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80
1994년 ‘동학 100돌’을 앞두고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동학농민전쟁이 새롭게 알려지며 화두로 떠오르자 누구보다 유족과 관계자들의 반응이 가장 뜨거웠다. 그동안 숨겨오던 조상의 얘기를 털어놓으며 너도나도 당시 자료나 유물·유품을 꺼내놓았다. 태안에서는 농민군을 죽이는 데 쓰였던 작두, 장흥에서는 땅에 묻어두었던 조총, 화순에서는 농민군의 옥중 편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겨우내 얼었던 냇물이 100년 만에 녹아 흐르기 시작한 셈이었다.
이어 여러 기념사업 단체가 전국에서 조직되었다. 전주에서는 오랜 준비를 거친 끝에 1992년 6월 창립대회를 열었다. 이듬해 ‘전주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로 사단법인 등록을 했는데, 한승헌 이사장, 조성용 부이사장, 신순철·이종민·서지영 등이 이사를 맡았고 사무국장에는 문병학이 선임되었다. 이 단체는 전북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참여해 전 도민적 기구로 발족했다.
이어 93년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꾸려졌다. 정읍은 고부봉기 또는 황토현전투의 발상지여서 이미 67년부터 최현식 문화원장을 중심으로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해마다 황토현 전승기념일에 축제를 벌였고 만석보 유지비 등을 세우는 사업을 추진했다. 그 맥을 이어 김현·조광환 등이 순수한 민간단체로 발족한 것이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에서는 93년 산하에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 특별위원회를 발족했다. 임진택·정희섭·양정순 등이 다른 단체와 연대사업을 지원했다.
94년 1월에는 고창 기념사업회가 탄생했다. 오랫동안 농민혁명 관련 유적, 곧 무장관아, 전봉준 생가 마을 등을 조사해온 이기화 고창문화원장의 노고가 컸다. 비슷한 시기에 광주·전남의 기념사업회도 발족했는데 전남대 이상식 교수가 모든 일을 추진하고 이끌었다. 뒤이어 같은 해 4월 상주 기념사업회가 발족해 회장은 박찬선 상주문인협회장, 사무국장은 강효일 <한겨레> 상주지국장이 맡았다. 94년 6월에는 공주에서 진영일 교수의 노력으로 우금티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공주는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있는 곳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의미있는 단체를 소개할 차례다. 그동안 백추위의 연구위원들은 많은 유족들을 만나 증언을 듣고 자료를 수집했다. 그런데 유족들을 한데 모으는 일정한 조직체가 없었다. 그래서 94년 1월 백추위에서는 역사문제연구소의 필동사무실로 유족들을 초청해 처음으로 30여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답사를 다니면서 우리가 발굴하거나 다른 기념사업회에 연락해서 찾아낸 이들이 함께한 첫 간담회였다.
그 첫 모임에서는 유족을 대표한 정남기와 백추위의 우윤 연구위원이 실무를 맡아 ‘동학혁명유족회’ 발족의 의의와 사업계획을 짜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만나 스스로 조직체의 필요성을 알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역문연에서 연 발기인대회에서는 농민정신의 계승, 농민군의 명예회복, 증언록 제작 지원, 추모대회 동참 등을 유족회의 활동 목표로 내걸었다. 마침내 그해 3월3일 동아클럽에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초대 유족회장에는 김영중(영호대접주 김인배의 후손)이 추대됐으며, 실무는 정남기·손주갑 등이 맡기로 했다. 100년 만의 첫 모임이었던 만큼 회원 69명을 포함해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당시 김도현 문체부 차관, 국회의원인 조세형과 이부영, 오익제 천도교 교령, 이돈명 변호사, 이종수 충남대 교수, 작가 박완서, 시인 신경림 그리고 연구자인 최현식·이기화·김범수 등도 함께했다. 그 의의와 농민군의 서훈 문제를 두고 조 의원이 주제발표를 했고, 이돈명 등 몇몇 인사들이 축사와 격려사를 했다. 또 임종석·임수경 등 학생운동권 인사들도 참석했다.
100년 만의 해원(解寃·한풀이)이었을까, 유족회는 첫출발부터 화기가 넘쳤으며 화려했다. 그런데 작은 소동도 빠지지 않았다. 동아클럽 쪽에서 임종석·임수경 등의 참석 때문인지, 유족들이 시위라도 벌일까 염려해서인지, 장소를 빌려주지 않으려 해서 실랑이 끝에 겨우 계약을 할 수 있었다. 뒤풀이 자리에서도 일부 유족들이 두 사람의 참석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시끄러웠다. 당시 김영삼 정권의 ‘쪼가리 민주화’ 탓이기도 했을 것이다.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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