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100돌을 앞두고 1993년 8월 세번째 중국기행에 나선 필자는 ‘청일전쟁 답사팀’ 일행 31명을 이끌고 우여곡절 끝에 백두산 천지에 올라 제를 올렸다. 앞줄 왼쪽부터 황승우(승복 차림)·필자·서중석·김정기·최순식(엎드린 이)씨 등이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83
동학농민전쟁 백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백추위)에서는 1993년 여름 9박10일간 중국 역사기행을 진행했다. 위원장으로서 내가 단장을 맡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세번째 중국행이었다. 우리는 역사문제연구소(역문연) 식구들을 중심으로 해서 ‘청일전쟁 답사팀’이란 이름으로 기행 참가자를 모집하고 한겨레신문사를 후원으로 내세웠다. 신청 서류가 아주 복잡해서 실무간사인 장영희가 수고를 많이 했는데 한겨레 쪽 도움이 컸다.
당시만 해도 안기부의 허가를 받는 절차가 매우 까다로웠다. 결국 내가 친분이 있는 윤여준 당시 안기부 특보를 찾아가서 학술 성격을 지닌 답사팀이라 말하고 협조를 부탁했다. 그는 부드럽게 ‘그러마’고 응답했다. 그런데 출발 예정일 이틀 전까지 아무 소식이 없어서 포기해야 하나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하루 전에야 허가가 나왔다. 그 때문에 8월13일 김포공항을 출발한 일행 31명은 직항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해 일본 후쿠오카로 가서 중국 다롄행으로 갈아탄 뒤 다시 베이징으로 가는 복잡한 여정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베이징에 도착한 날 오후 일행을 천안문광장에 풀어놓으니 모두들 신이 나서 돌아다녔다. 그러다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다음 행선지인 선양행 열차 시간에 20분이나 넘게 늦었다. 다행히 우리를 기다린 듯 열차는 떠나지 않았고, 특급 침대칸에 든 일행은 잠도 자지 않고 날이 샐 때까지 독주를 마시면서 떠들어댔다. 그런데 선양에서 버스를 차고 단둥으로 가니 안기부 직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불쾌했으나 참는 수밖에…. 우리는 압록강 유람선을 탔는데 훗날 역문연의 장영희는 그 감회를 이렇게 썼다. “나는 배를 탔는데 이북이 고향인 아버지가, 역사기행을 떠나기 전 압록강에 간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거기서 고향이 오십리이니 소리치면 누군가 나올 거다’라고 했다. 건너편 북한 주민이 고기 잡고 자전거 타고 산보하는 것을 보니 기가 막혔다.” 그만의 안타까운 소회가 아닐 것이다.
일행은 선양으로 다시 나와서 넓은 식당에서 민족출판사 인사 10여명 등 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조촐한 강연회를 했다. 단둥의 박문호 선생과 내가 청일전쟁에 대해 발표를 했으나 모두들 들떠 있어서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다시 특급열차를 타고 밤을 새워 연길역에 도착하니 역문연 연구원으로 이곳에서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신주백과 답사를 하러 온 박혜란(전 <동아일보> 기자), <혼불>의 작가 최명희(작고), 그리고 연변의 소설가 임원춘 부자가 마중을 나와 우리를 환영했다. 연변대학 강당에서 그곳 박창욱 교수와 서중석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그다음날 최명희·김춘선(연변대 연구원)과 동행해서 용정의 여러 유적을 둘러보고 백두산으로 길을 떠났다. 백두산은 마침 맑아서 천지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김제의 향토사학자 최순식 선생이 싸온 제물을 차려놓고 천지에 소주를 뿌렸다. 그런데 우리의 행동을 살펴보던 중국 공안원이 안내 겸 통역을 맡고 있는 임원춘 선생의 아들을 끌고 갔다. 그리고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500달러의 벌금을 물렸다. 91년 답사 때와 달라진 모습이었다. 백두산에서 돌아올 때는 비가 세차게 내렸다. 나는 청산리 옆을 지나면서 김일성이 낚시를 하던 터도 이 언저리에 있다고 일러주었다. 지루한 시간을 때우려 노래도 불렀다. 그랬더니 누군가가 한국전쟁 때 배운 ‘김일성 노래’라며 ‘장백산 줄기 줄기~’를 부르기도 했다.
도문(투먼)에 도착하니 또 안기부 직원이 찾아왔다. 도문 시내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데 또래인 황지우와 우윤은 서로 소리를 지르며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호텔에 들어와서도 일행은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국경의 밤’은 모두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두고 장영희는 “도문에서 ‘너는 너무 눈물이 많아’, ‘낭만적 민족주의자야’ 등 비판도 하면서, 스스로 반성도 하면서 감정들이 격하여 갔고 언성을 높여 갔다”고 썼다.
귀국하는 길은 웨이하이에서 여객선을 이용했다. 여름밤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하게 빛나 모두들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런데 인천세관에서 또 탈이 났다. 안기부 파견직원이 김정기 교수의 짐에서 김일성 자서전인 <세기와 더불어>를 찾아낸 것이다. 이 책이 막 출간된 무렵이어서 다른 이들도 사기도 하고 선물로 받기도 했는데 김 교수의 것만 적발이 된 것이다. 그는 몇 시간을 시달린 끝에 교수라는 신분 덕분에 별탈 없이 풀려났다.
그때 기행 경비를 결산해보니 아껴 쓴 덕분에 600만원쯤 남아 백추위의 기금이 불어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런데 뒤탈이 나고 말았다. 안기부 직원들이 최순식 선생 등 몇 사람을 불러내, 김일성 노래를 누가 불렀느냐, 김대중의 선물을 누가 연변대학에 전달했느냐 따위를 캐물은 것이다. 그때 동행취재한 정재권 기자는 이 과정을 <한겨레>에 실었다. 역사학자 <한겨레 인기기사> ■ 내가 잠든 사이 스마트폰 데이터통화 귀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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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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