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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 찾아서] 서북공정·서남공정…멈추지 않는 중국 ‘패권주의’ / 이이화

등록 2011-02-28 18:32

2004년 1월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와 국학원 회원들이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고 하는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자료사진
2004년 1월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와 국학원 회원들이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고 하는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자료사진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98
중국은 주변의 이민족을 묶어 ‘오랑캐’라 하였다. 오랑캐들은 끊임없이 중국을 침입했다. 그리하여 이들을 깔보고 문화가 열등하다고 하여 차별관과 적대관이 성립했다. 이런 차별관은 차츰 중화사상과 중화주의의 이론으로 정리되었다. 중국은 통일왕조의 왕을 천자(天子)라 불렀다. 천명을 받아 만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랑캐들도 천자의 왕화를 입어 중화문화에 흡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에 이웃한 까닭에 중국 문화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창설 초기 소수민족 정책은 중화주의에 토대를 두지 않았다. 소수민족을 보호하고 그들의 언어와 풍습과 문화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이런 바탕에서 소수민족 자치구와 자치주를 설정해주는 정책을 폈다. 이들은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고유의 민족정서를 지닌 채 살 수 있었다. 무마나 회유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1990년 들어 중국 사회과학원에서는 일부 학자를 동원해 고구려 역사에 대해 ‘일사양용’(一史兩用)의 이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고구려 역사는 한국사일 수도 있고 중국사로 포함될 수도 있다는 교묘한 논리였다. 90년대 중반부터는 고구려는 중국 소수민족의 역사로, 그 영토도 현재 중국 영토에 대부분 들어 있으므로 중국사에 포함된다는 해괴한 논리를 전개했다. 이를 좀더 살펴보자. 고구려의 왕조 성씨 ‘고’는 중국 고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조공을 한 것은 복속국가임을 증명한다고도 하였고 수나라·당나라와의 전쟁은 내부의 통일전쟁이라고도 하였다. 이것이 동북공정의 전초였다. 동북공정의 중간발표에는 고조선을 연 단군과 그 영역이 모두 중국 상고사에 포함되며 요하문명권을 이룩한 민족은 모두 중국 민족이라는 논리도 개발하였다.

이에 앞서 그들은 서북공정, 서남공정을 계획하여 현재도 진행하고 있다. 이들 공정은 중앙아시아 국가와 동남아시아 국가를 고구려와 같이 모두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작업이다. 곧 타슈켄트, 키르기스, 티베트의 역사에 해당한다. 또 몽골족이 세운 원 왕조를 비롯해 내몽골의 역사도 중국사에 편입되는 효과를 기할 수도 있다. 이는 바로 중화주의의 부활이다. 한가지 다른 점은 중화사상은 민족차별관에서 출발했으나 이 공정작업에서는 소수민족으로 범위를 설정한 것이다.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우리는 현재 이 공정으로 말미암아 민족의 뿌리가 사라지고 역사 판도는 형편없이 축소·왜곡되는 환경에 가로막힌 것이다.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를 중심으로 한 동북공정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주변의 현대 민족국가들은 까마득한 고대국가 시기부터 이어져온 차별적인 중화사상 또는 중화주의에 매몰될 것이다. 이들 공정은 중국 패권주의와 맞물려 있다. 다시 중국 패권주의의 부활은 주변국가의 긴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동북공정은 한마디로 말해 소수민족 통일국가론에 따라 고조선·고구려·발해를 중국 소수민족의 정권으로 규정해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이었다. 그중에서도 고구려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많은 논문을 양산해냈다.

중국은 공정이 계속되는 동안 남쪽 학자들의 접근을 막았고 공정과 관련한 자료 유출도 통제했으며 유적의 비디오나 사진 촬영도 금지했다. 중국 국적을 지닌 조선족 학자들도 동북공정의 진행에 대해서는 몸조심하느라고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현재도 안시성 등 유적에 허가 없이 들어간 학자나 사진작가들에게는 재입국 비자를 내주지 않고 있다. 하지만 2004년 한국 정부와 역사학자와 민간단체의 강력한 항의에 부닥쳐 논문 발표를 자제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개방을 허용하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다.

2008년까지도 집안(지안) 일대에서는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표지판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정비와 개수를 한 뒤 유물들이 개방되고 있으나 여전히 비디오 촬영은 금지하고 있다. 현지 가이드들은 고구려와 관련된 설명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또 만주에 있는 조선족 출신 학자들도 동북공정과 요하문명론에 대해 거의 논의를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다. 이를 보아도 중국 당국의 역사 왜곡 의도를 짐작할 것이다.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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