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공동 학술대회에 참가한 양쪽 역사학자들이 온정각 휴게소 앞마당에 전시된 고구려 고분벽화 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필자를 비롯한 참가자들은 비옷을 입은 채 진지하게 행사에 집중했다. <한겨레>자료사진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99
2004년 9월 11~12일 금강산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공동대응하고자 남북 역사학자들이 모였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역사학자들이 공동학술대회를 연 것이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의 남쪽 위원장은 강만길, 북쪽 위원장은 허종호 선생이었는데, 남쪽에서는 100여명, 북쪽에서는 40여명이 참가했다. 이 행사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응한 학술발표와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해 남북 공동 사진전을 준비하기 위해 열렸다. 장소는 온정각 휴게소 앞마당이었는데 가을인데도 금강산 일대에는 차가운 비가 줄줄 내렸다. 그때는 남북관계가 긴밀해 남쪽의 통일부와 북쪽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의 지원 덕분에 행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남북 역사학자들은 한결같이 ‘고구려사는 우리 민족사이니 이를 지켜야 한다’는 발표를 했다. 남쪽에서는 서영수(단국대)·최광식(고려대) 교수 등이 발표를 맡았는데 중국의 고구려사 해석이 근거 없는 왜곡이라고 강하게 질타했으며, 동북공정에 대해 남북이 공동으로 연구하고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쪽의 남일룡 김일성대학 역사학부 강좌장도 ‘조공관계는 봉건중세의 한갓 외교 의례에 불과하고, 중국이 황제국가란 명분으로 고구려의 통치를 왜소화하고 지방정권 또는 속국이라 하는 것은 객관성을 무시한 것이며, 수·당과의 전쟁을 국내전쟁으로 보는 것은 완전한 억지요 역사왜곡’이라며 중국의 논리를 반박했다.
조선고고학회 손수호 위원장은, 고구려는 서기전 227년에 세워진 고조선의 계승국으로서 1000년을 유지했다는 ‘천년왕국설’을 주장했다. 곧 <삼국사기>의 건국 연대를 연장해 언급한 것이다. 그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직접 발굴했다고 말하면서 벽화의 예술성도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북쪽의 이론에는 사회주의식 도식화는 없었지만 주체에 입각한 민족우월주의의 경향이 짙게 나타났다. 또 그들은 ‘동북공정’이란 용어와 당시 중국 사회과학원의 계획에 대해서는 애써 직접적인 언급을 피했다.
남쪽의 강만길 위원장은 “고구려사를 두고 남과 북이 함께 토론했다는 사실이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따로 놀던 남북 역사학계가 함께 토론했다는 점은 큰 성과다. 하지만 북쪽 발표자들이 북한 정권의 정책 및 중국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듯 중국의 역사왜곡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동북공정’이라는 단어조차 사용을 피한 것 등은 아쉬운 점이다. 앞으로 남북 역사학계가 고구려 문제에서 공동보조를 맞추는 데 적잖이 어려움이 따를 것 같다.”(<한겨레> 2004년 9월13일치) 나는 직접 행사를 주관하지 않은 까닭에 조금은 자유스러운 위치에서 솔직한 견해를 밝혔던 것이다. 어쨌거나 비옷을 입고 행사를 치렀는데도 모두 진지했다.
아무튼 학술대회를 무사히 끝내고 남북 공동 발표문을 냈는데, 나는 조금 부드럽다고 여겼다. 한편 벽화 전시 때에는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공개되었다. 모두 북한에 있던 벽화를 전시했는데 북쪽의 손 위원장이 화려하고 능숙한 수사로 진행해 관심을 끌었다. 이들 벽화는 연장 행사로 진행되어 서울에서도 일반에 공개되었다.
저녁시간에는 팀을 10여명쯤 짜서 작은 모임을 가졌다. 내가 속한 팀에는 민화협과 보위부 관계자들이 자리를 함께한 탓인지 동북공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고 술만 마셨다. 북쪽의 한 소설가는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사전에 정보를 나누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박태원의 뒤를 이어 ‘갑오농민전쟁’에 대해 소설을 쓰고 싶다고 밝히면서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 우리가 낸 사료집인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30책을 강만길 교수와 이종학 소장(사운연구소)의 배려로 북쪽 사회과학원에 전달했으니 잘 검토해보라고 일러주었다. 그는 소설이 완성되면 내게 한번 검토를 부탁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날에는 해금강 등지의 답사를 끝내고 저녁시간에 우리끼리 모였다. 말조심할 일이 없으니 자유스러웠다. 처음 금강산에 온 탓인지, 독한 북한산 인삼주를 연달아 들이켠 방기중 교수(연세대·2008년 작고)는 나에게 “이 좋은 경치 앞에서 남북 역사학자들이 모였으니 한시를 한 수 지어보시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술이 약한 나도 이미 취해 있었으니 평소에 잘 지어보지 않던 한시가 금방 나올 리가 없었다. 역사학자
역사학자 이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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