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동아시아평화인권국제회의에서 만난 한국전쟁 피해 유족들 가운데 류춘도(왼쪽)·채의진(오른쪽)씨의 기구한 사연은 필자가 2000년 9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으며 과거사 청산 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03
21세기 들어 우리 사회가 여전히 해묵은 이데올로기 문제로 사회적 갈등을 빚고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또 근래 들어 과거사 청산 문제로 사회분열을 조장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여기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올바른 역사의식을 제고하고 민주가치를 존중하며 인권사회로 가는 도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념 갈등과 과거사 청산의 중심에는 한국전쟁 전후의 ‘양민학살’ 문제가 놓여 있다. 그 피해자들은 역대 독재정권 아래에서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인 채 숨죽이며 살아왔으며 늘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또 군이나 경찰에 들어가 출세할 수도 없었으며 외국 유학이나 여행을 갈 적에도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극한의 인권유린이 아닐 수 없다. 이 문제의 해결에는 두 가지 전제, 곧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유족들에게 적용되는 연좌법의 철폐가 이뤄져야 했다.
양민학살 문제는 2000년 2월 제주인권학술회의에서 처음으로 거론됐다. 피해자 구제 운동을 펼치자는 제안이 나온 것이다. 이어 그해 5월18일 전남 구례 일대에서 열린 동아시아평화인권국제회의에서 사회단체와 유족회 관계자들이 모여 본격적으로 논의를 했다. 이 자리에는 김동춘 교수(성공회대), 이영일 소장(여수지역사회연구소) 등 관계자 30여명이 모였고, 나도 참석했다. 우리는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그곳에서 새삼 한국전쟁의 아픈 유산을 되새겼다.
나는 이 모임에서 인상깊은 두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고 류춘도 선생이다. 류 선생은 일본 오키나와에 이어 두번째 상면이었다. 용모가 곱고 말씨도 조용한 그와 나는 제법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대학생이던 한국전쟁 때 인민군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가 후퇴하는 과정에서 남쪽 고향으로 돌아온 기묘한 경력을 지닌 할머니였다. 자신의 경험을 서사시로 엮은 책 <잊히지 않는 사람들>에 이어 자서전 <벙어리새>를 펴내 화제를 모았다. “전쟁이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파괴하며 강자가 약자를 어디까지 철저하게 짓밟는가도 보았다. 나는 이런 전쟁의 부조리에 분노했고 망가져 가는 영혼에 통곡했다. 지난 세월은 참으로 길었다. 그 기나긴 세월 속에서 눈 질끈 감고 보통사람이 되기에는 전쟁의 상처가 너무나 컸다.” 그가 평화운동가로 변신한 이유였다.
또 한 사람은 채의진 선생이다. 채 선생은 당시 생활한복에 빨간 베레모를 쓰고 머리를 허리 아래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첫인상이 어느 신흥종교 교도쯤으로 보였던 까닭에 나는 되도록 그를 멀리하려 했다. 그런데 나중에 사연을 들어보니, 채 선생은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 12월24일 문경 석달마을에서 국군이 24개 가옥을 모두 불태우고 어린이·부녀자·노인을 가리지 않고 마을 주민 127명에게 무차별 총격을 해 86명이 즉사했을 때 13살 어린 몸으로 형과 사촌동생의 주검 밑에 깔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었다. 그 뒤 어렵사리 학교를 마치고 영어선생이 되긴 했으나 늘 악몽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그래서 89년부터 혼자서 석달마을 양민학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국회 등 관계기관을 줄기차게 찾아다녔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머리를 깎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그의 사연은 너무나 구구절절했다.
두 분의 인생사를 들으며 나는 전쟁의 참상과 인권유린의 심각성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와 비슷한 사연을 지닌 유족들이 지금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널려 있지 않은가. 마침내 그해 9월7일, 시민단체의 연합체인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범국민위)와 각 지역의 유족회를 통합한 전국유족회가 기독교연합회관에서 출범했다. 이 자리에서 강정구·채의진 등이 상임 공동대표로 추대되었고 나도 공동대표에 이름을 올렸다. 또 국회에서 김충조·김원웅 의원 등이 참석해 입법 활동을 돕기로 했다. 창립식을 마친 뒤 참가자들은 여의도에서 입법을 호소하는 상여시위를 벌여 시민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날 이후 나는 10여년 동안 이들과 운명처럼 어울리게 되었다. 역사학자
역사학자 이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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