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범국민위원회의 활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2004년 7월 서울 운현궁에서 열린 ‘문제 채의진 서각전’ 개막 행사에서 범국민위 공동대표이기도 한 채의진(왼쪽 두번째)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맨 오른쪽이 필자.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06
2000년 9월 전국유족협의회와 민간인학살 관련 전국사회단체, 그리고 관련 연구자와 언론인·종교인·일반시민들이 모여 결성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범국민위)는 출범 때부터 내내 심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소액 후원금이나 회비만으로는 지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가지 방안을 모색했다.
첫째로는 기금 모금을 위한 서각전을 열기로 했다. 마침 서각가인 공동대표 채의진 선생이 기꺼이 작품을 내놓기로 했다. 그는 상주에 살면서 나무뿌리 등 자재를 산에서 손수 캐서 작품을 만들기로 유명했고 돈을 준다 해서 작품을 함부로 팔지 않는 고집을 지켜 제법 희소성이 있었다. 서각전을 위해 몇달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품을 만드는 그를 지켜보면서 나는 전시회 준비에 몰두했다. 마침 10년 계획으로 작업한 <한국사 이야기>의 집필을 끝낸 참이라 한층 신바람이 났던 것도 같다.
2004년 7월22일부터 닷새 동안 서울 운니동의 운현궁 양관에서 ‘문제 채의진 서각전’이 열렸다. 또 신영복 교수의 한글 글씨를 서각해서 전시했다. 채 선생과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시장을 지키고 작품을 소개했다. 여기저기 아는 인사들을 초대해서 작품을 팔았다. 내 친구인 박재승 변호사는 내 강요에 못이겨 금사경(金寫經)인 ‘심야심경’을 고가로 구입해 주기도 했다. 그런 덕분에 약 4000만원의 기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우리는 후원회원 모집에도 박차를 가했다. 집행부와 실무 관계자들은 회원 신청서를 들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가입을 권유하는 게 거의 일과였다. 매월 몇천원부터 몇만원까지 형편껏 자동이체로 회비를 내는 방식으로 부담을 줄였다.
그 무렵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활동도 했던 나는 두 단체의 회원 신청서를 주머니에 따로따로 넣고 다니면서 상대의 관심도에 따라 골라 내밀었다. 내가 석좌교수로 출강하던 서원대에서는 역사교육과 교수들을 모조리 범국민위 후원회원으로 가입시켰는데, 특히 남지대 교수는 “직접 나서서 돕지 못해 늘 마음이 아팠는데 회원으로라도 돕겠다”고 하면서 매월 3만원씩 내주었다. 또 국회의원들도 여럿 동참해 주었다. 이춘열·이영일·김동춘·한대수 등 운영위원들도 저마다 힘을 많이 썼다.
이런 노력 덕분에 범국민위의 활동 기금은 그럭저럭 숨이 조금 트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모임이 있을 때마다 밥값 술값은 개인 주머니를 털어야 했다. 평생 차별과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온 유족회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꼬깃꼬깃 찔러둔 만원짜리를 꺼내는 모습은 눈물겨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아예 내가 먼저 낼 때가 많았다. 또 김영훈 상임공동대표는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비행기를 타고 와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했는데 늘 회비를 챙겨 내고 때때로 경비를 지원해주는 열성을 보였다. 유족 중에도 넉넉한 부자들이 없지는 않았을 터인데 어찌된 일인지 그런 회원들은 모임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이 역시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일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17대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역풍을 타고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다. 그러자 새로운 입법안의 청원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강창일 교수도 당선돼 여의도에 입성했는데 그는 제주4·3연구소 소장과 이사장, 범국민위 운영위원장 등으로 활동했으니 ‘우리 식구’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로서는 든든한 지원자를 확보한 셈이어서 모두들 새로운 기대로 고무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8·15 경축사를 통해 포괄적 과거사 청산을 제안했다. 그에 따라 4대 개혁법안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곧 국가보안법 철폐, 사립학교법 개정,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법 제정, 군의문사법 제정 등이었다. 이 가운데 노 대통령의 제의에 따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2005년 5월3일 마침내 통과되었다.
한국전쟁 관련 독자 입법은 아니었지만 55년 만에 정부 차원에서 피해자 구제 대책이 나온 순간이었다. 이날을 위해 범국민위 관계자들과 유족들은 얼마나 많은 눈물과 고난을 겪으면서 싸워왔던가? 여의도 국회를 바라보며 겨울의 칼바람과 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촛불집회를 하고 농성을 하고 결의대회를 한 지 햇수로 6년째였다. 여의도에 모여 있던 우리는 법안 통과 소식을 듣자마자 모두들 환호와 눈물을 쏟아냈다. 역사학자
역사학자 이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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