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이이화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10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돌의 여러 행사를 끝낸 뒤에도 유족회와 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전공 연구자들은 농민군을 ‘역적’이라 불러온 누명을 벗기고 명예회복을 위한 입법 추진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전국에 걸쳐 수만명의 지지 서명을 받기도 하고 국회 등 관계부처에 특별 입법을 촉구하기도 했다.
국회에서는 2001년 갑오동학농민혁명연구회를 발족시키고 회장에 김태식, 간사에 윤철상·권오을 의원을 선임했다. 연구회의 초청으로 함께 세미나도 열고 여러 의견도 들었다. 또 정남기·신영우·우윤·이이화 등이 청문회에 나가 그 역사적 의의를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박관용 국회의장은 “백년 전 이 사건 참여자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려면 임진왜란 때 희생된 사람들도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참으로 무지한 발언을 서슴지 않아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마침내 2004년 3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됐다. 윤철상 의원의 노고가 컸다. 이 특별법에는 보상 규정은 없었으나, 농민군의 역적 누명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벗기고 110년 만에 명예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심의위원회가 발족되고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문화부·법무부 등 유관 부처의 장관과 유족 등 관계자들이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문화부 안에 사무국도 꾸려졌다.
동시에 그해 11월에는 유족과 각계 인사를 중심으로 기금을 모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을 출범시켰다. 기념단체 관계자들은 물론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 유족의 자격(?)으로 기금을 냈다. 재단 이사장에 이이화, 상임이사에 정남기(훗날 언론재단 이사장)가 선임되었다.
재단 사무실은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배려로 경복궁 안의 옛 국립박물관(고궁박물관) 안에 마련됐다. 농민군이 타도 대상으로 삼았던 궁궐에 그들을 위한 재단이 들어갔으니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2006년 12월 동학 112돌 전국기념대회는 ‘특별한 사건’으로 화제가 됐다. 조기숙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 공주 유스호스텔에서 열린 유족회의 밤에 참석해 눈물을 흘리면서 조상의 죄를 사죄한 것이다. 한 보수언론에서 ‘조 수석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증손녀’라는 사실을 폭로하듯 다룬 직후였다. 그는 자신이 참회하는 길은 세 가지라고 말했다. 절에 가서 108배를 계속하는 것, 유족회와 재단에 기금을 내는 것, 공식 자리에서 사죄의 절을 하는 것이었다. 어찌 그가 자기 의지로 조병갑의 후손으로 태어났겠는가. 그 용기에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유족회 노인들은 한 분도 ‘딴죽’을 걸지 않고 그 절을 흔쾌하게 받아주었다.
2007년 11월 113돌을 맞아, 재단에서는 경복궁 흥례문 앞 광장에서 동학군과 진압군의 후손을 한자리에 초청해 ‘화해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들은 조상의 영령 앞에 해원·화해·상생을 굳게 다짐하면서 서로 평등을 누리고 인권을 존중하는 미래를 개척해 나가자고 선언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민중이 압제에 짓눌려 존엄성이 말살되고 나라의 운명이 외세 앞에 흔들릴 때 감연히 목숨을 역사에 던졌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같은 민족인 동학농민군과 관군·민보군은 불행히도 일본의 간교한 술수로 서로 맞서 살육을 저지르며 원한을 만들어냈다…. 그동안 우리 후손들은 식민지 지배를 겪고 민족이 분단되는 비극의 시대를 살아왔다. 1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 후손들은 진정 서로 손을 맞잡고 해원과 화해를 이루고자 한다. 이는 상생의 길임과 함께 자유롭고 평화롭고 풍요로운 미래사회를 여는 길이 될 것이다.”(화해의 사발통문, 이이화·신영우 작성)
동학혁명 당시 금산에서는 고부봉기와 거의 같은 시기에 봉기했는데, 금산 농민군을 제압한 세력은 유림들과 보부상들이었다. 금산기념사업회 이동복 회장은 이들의 후손을 설득해 화해·상생의 마당에 동참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박찬요 등 7명이 즐거운 마음으로 참석해 유족들과 어울렸다. 이분들은 열린 마음으로 인사말을 하면서 “예전 우리 조상들은 다같이 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만나 서로 화해하고 상생합시다”라고 말했다. 대단한 의미를 준 말은 아니었지만 우리 주최 쪽에서는 너무나 감격했다. 행사를 마친 뒤에도 유족들과 후손들은 서로 악수를 하며 편하게 어울렸다.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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