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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정권 바뀌자 ‘동학재단’ 이사장에 낙하산 투하 / 이이화

등록 2011-03-17 20:42

2010년 4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특수법인 인수를 앞두고 마지막 이사회를 연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로써 필자(앞줄 맨 가운데)는 이사장 자리를 넘겨주고 ‘동학 100돌 기념사업’을 마무리했다.
2010년 4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특수법인 인수를 앞두고 마지막 이사회를 연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로써 필자(앞줄 맨 가운데)는 이사장 자리를 넘겨주고 ‘동학 100돌 기념사업’을 마무리했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11
2004년 출범을 전후해 동학농민혁명재단에서는 문화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여러 사업을 펼쳤다. 우선 유족 범위를 손자에서 현손으로 확대하는 개정법을 추진했다.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상태여서 실제 생존한 농민군의 손자는 수십명에 지나지 않아 법의 실효성이 별로 없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었다. 개정 작업에는 강창일·이광철 의원이 앞장을 서주었다. 그 결과 등록 사업을 통해 1만3000여명의 유족을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는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주도하며 사업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특별위원회 회의를 국무총리가 직접 주관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후기 상임이사였던 신영우 교수와 이사였던 신순철 교수는 정말 헌신적이었다. 이리저리 사무실을 옮길 때나 행사를 벌일 때마다 개인 주머니를 털어 냈다. 또 박재승(변호사)·장병화(기업인)·이상희(변호사)·박은주(김영사 발행인)·이순동(고전연구가)·전성준(전봉준의 양증손) 이사 등은 회비는 물론 필요할 때마다 경비를 내주었다.

재단과 관련해 한가지 남겨둘 얘기가 있다. 특별법에 따라 동학재단은 특수법인으로 승계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하지만 정부가 승인을 해주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다른 몇몇 과거사 위원회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법인 승계를 하지 못한 사례가 있었다. 다행히 담당 부처인 문화부의 담당자들이 특수법인 설립을 위한 준비를 서둘러 주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심의위원회의 여러 사업을 승계하면서 연구소 설립도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예산 절감을 구실로 실현을 보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16억원 정도의 예산으로 사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특별법이 통과될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성과를 얻은 셈이었다. 사실 이 수준에서나마 기념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뀐 뒤 우리를 실망시키는 일들이 벌어졌다. 새 재단 이사장으로 엉뚱하게도 한나라당 공천으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인사나 이 분야에 아무런 관심이나 이해가 없는 인사를 추천한 것이다. 기존 재단의 정관에는 기존 이사회에서 새 이사장을 추천하게 규정해 놓았는데도 이를 무시한 일이었다. 무슨 이권 자리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었으니 우리는 어찌해볼 수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도의 품위를 지닌 인사를 새 이사장으로 추대하고 싶었다. 우리 재단 이미지를 짓밟는 일이 벌어지게 되면 법인 설립을 거부하자는 주장도 터져 나왔다.

그러나 나는 일을 추진하는 책임자로서 법인 설립을 그런 이유로 포기할 수 없었다. 몇십년 동안 어떻게 걸어온 길인데….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마치 위상을 높여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새 이사장은 총장 출신 정도의 명사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다. 사실 그런 사람은 여기에 오지 않는다. 이권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곳이니 말이다.

정관 규정에 따라 기존 이사장이 새 이사장을 승계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지만 나는 그런 어설픈 자격 규정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사실 나는 이쯤에서 물러나서 저술에 몰두할 작정이었다. 여기에서 하나의 타협점을 찾았다. 문화부 장관이 2배수로 추천해주면 기존 이사장이 한 사람을 선택하는 편법을 쓰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2010년 4월 정식으로 특수법인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발족했다. 명예회복의 단계를 거쳐 선양사업을 전개할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마지막으로 해두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시 함께 일한 이사진들은 ‘내가 쫓겨나는 꼴이 되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만한 성과로도 만족했다. 참여정부 들어 과거사 관련 위원회들이 출범하는 데 일정하게 참여도 하고 기여도 했다. 그럴 때 유관단체에서 나를 장관급인 위원장으로 청와대에 추천하기도 했고 어느 때에는 청와대에서 이력서를 가져가기도 했고 언론매체에 물망에 올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나는 솔직히 역사학자로서 의미있는 일들이니 시켜준다면 받아들일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한번은 가족회의를 열어 의견을 물었다. 가족들은 세 가지쯤의 이유를 들어 반대를 했다. 암 수술을 한 뒤끝인데다, 평소에 하지 않던 출퇴근을 매일 하면서 일을 하다 보면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걱정했고, 글쟁이가 글을 써야 생명력이 있는데 몇년 동안 그런 일에 몰두하다 보면 저술을 포기해야 하니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고, 평생 야인으로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대중에게 심어진 이미지가 있는데 ‘권력’을 갖게 되면 평판이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옳은 말이었다. ‘이이화’의 사주에는 관운의 팔자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그런 자리에 한 번도 나가지 못했다.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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