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례대표 선정을 둘러싸고 당 지도부와 갈등을 빚고 있던 와중인 2008년 3월18일 서울 당산동 통합민주당 당사에서 공천심사위원회 위원들이 박재승 위원장 주제로 회의를 열고 있다. 맨 왼쪽 모자 쓴 이가 필자.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15
18대 총선을 대비한 2008년 3월의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회(공심위) 활동은 막바지로 갈수록 난항이었다. 3월11일 당시 최고위원 김민석은 당 최고위원회에서 공천심사를 두고 “박재승 전횡 공천” “외인군단 연줄 공천”이라며 공개적으로 맹비난하고 나섰고, 공동대표인 박상천은 공심위의 의결정족수를 과반수에서 3분의 2로 개정하자고 제의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공천 확정자 합의를 거부하고 공심위 해체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날 공심위원 12명의 간담회에서 박재승은 더 견디기 어려워 사퇴를 고려한다고 말하면서 그 성명서를 나보고 작성하라고 당부했다. 그리하여 나는 ‘순진하게도’ 모처럼 일찍 집으로 돌아와 밤늦게까지 성명서 초안을 작성했다.
한편 손학규는 당 대표인데도 지역구 신청을 내지 않았으며, 대선 후보의 한사람인 정동영도 자신의 지역구인 전주에 신청을 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공심위원들과 재야인사들로부터 서울지역에 출마를 해서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다. 두 사람은 회동을 해서 손학규는 ‘종로구’, 정동영은 ‘동작을’에 출마하기로 합의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마지막 단계로 비례대표 심사가 남아 있었다. 당직자들과 국민들의 촉각이 모두 쏠려 있었다. 비례대표 심사는 당규에 공심위 위원장이 심사위원장을 겸하도록 정해졌지만 12명의 심사위원은 최고위원회의의 심의를 거쳐 당 공동대표가 임명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대표들의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런데 그 심사를 코앞에 두고도 박재승 위원장에게 심사위원과 신청자 명단이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당에서 중개인인 박선숙을 통해 심사위원 명단을 전화로 받아 적으라는 통고를 보내왔다. 박 위원장은 심각한 심적 타격을 입은 듯이 보였다. 그 명단이 어렵사리 전달되어 살펴보니 역시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직자 몫’이라고 둘러댔지만 김민석·신계륜·김광삼 등 지역 공천 탈락자들이 들어가 있었고 나머지 외부 위원들도 거의 정치적 신념이 부족한 인사들로 채워져 있었다.
비례대표 신청자 명단 역시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말이 직능대표이지, 상위 순번에 주가조작으로 내사를 받고 있는 인물, 당직자들도 모르는 인물이 당직자로 포함되어 있었다. 참신한 정치신인이나 재야 명망가, 시민사회단체나 문화예술계 인사는 거의 빠져 있었다. 통합민주당에서 공천 혁명이 일어난다는 말을 믿고 정치신인들을 포함해 250여명이 심사비 300만원쯤을 내고 뒤늦게 몰려들었는데 이들은 상위 순번에서 거의 빠져 버렸다.
우리 민간위원들은 회의장에서 임시 간담회를 열고는 비례 명단에 항의하는 뜻에서 퇴진하기로 결의했다. 박경철은, 곧이어 위원들이 사퇴할 수 있다는 뜻을 기자들에게 발표했다. 나는 그동안의 경과를 적어 국민에게 알리는 마지막 사퇴 성명서를 작성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표할 기회는 없었다. 어렵사리 사태를 수습해 판이 깨지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비례대표 논란은 우리가 우려한 대로 두 대표가 밀실에서 나눠먹기로 순번을 결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 위원장은 자신이 한 일은 딱 두가지였다고 하소연했다. 정아무개 당 원로의 ‘애송이’ 아들과 전두환 비서관 출신인 송아무개를 당선 예상 순번에서 벗어나게 뒤로 돌린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두번째 인물에 대해 손학규는 당료를 시켜 집요하게 당선권 안에 넣으려 시도했으나, 박재승이 두시간에 걸친 정체성 발언을 통해 기어코 막아냈다. 비례대표 명단이 발표되자 언론의 호된 비판을 받았고 시민의 항의도 거셌다.
비례대표 논란은 새삼 우리를 깊이 반성케 하는 주제가 되었다. 구태정치를 벗어나지 못한 단적인 사례였던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지역공천은 나눠먹기나 지분 챙기기 따위 구태정치 관행을 ‘정치 아마추어’인 외부 심사위원들이 의지로 막아낸 ‘개혁’이었다. 그러면 81석의 당선이란 성과는 누구의 공이겠는가? 당이나 대표의 공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당 인사들은 우리들의 인기를 질투해서인지, 월권을 했다고 생각한 탓인지, 자기네들 지시를 따르지 않아서인지 끊임없이 딴죽을 걸고 해촉을 논의했다. 공심위는 당으로부터 뭇매를 맞았으나 민주시민의 성원에 힘입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시한번 돌아보면 공천이 끝난 뒤 당에서 진행한 공천자 전진대회에도 공심위 위원장과 위원들은 초청을 받지 못했으며 당사에서 열린 공심위 해단식에는 당 관계자가 한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그 뒤에도 당 대표를 비롯해 당 지도부로부터 “수고했다”는 겉치레 인사 한마디도 들은 적이 없다. 이는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비인간적인 처사였다. 역사학자
역사학자 이이화
다시한번 돌아보면 공천이 끝난 뒤 당에서 진행한 공천자 전진대회에도 공심위 위원장과 위원들은 초청을 받지 못했으며 당사에서 열린 공심위 해단식에는 당 관계자가 한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그 뒤에도 당 대표를 비롯해 당 지도부로부터 “수고했다”는 겉치레 인사 한마디도 들은 적이 없다. 이는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비인간적인 처사였다.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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