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2월 다섯살 때의 필자. 솜씨 좋기로 소문난 어머니가 손수 지어준 색동옷에 모자와 모피 목도리까지 한껏 멋을 낸 차림에서 무남독녀 외동딸의 귀티가 역력하다.
[길을 찾아서]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①
지난 삶을 글로 쓰려 하니 많은 생각이 오간다. 나로 인해 마음 아팠을 사람도 있고 상처를 입은 사람도 있을 터이니 우선 그분들께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글을 시작한다.
어릴 적 외할머니는 나를 얻기 위해 지극정성을 기울였다는 얘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어머니와 외숙 남매를 둔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결혼 8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자 무등산을 오르며 꾸준히 기도를 하셨다. 겨울에도 얼음 계곡물로 몸을 씻고 올라가며 치성을 드렸단다. 1936년이었다. 그렇게 나는 무남독녀로 자랐다.
외할머니가 그때 백일기도를 하면서 꾸신 현몽 얘기도 잊히지 않는다. 꿈에 귀한 약초를 본 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잘 다니시던 한의원을 찾아가 꿈에 본 약초 이야기를 했더니 그 자리에서 약을 지어 줬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어머니는 그 약을 다 드시기도 전에 나를 가졌단다. 남은 약을 물려받아 먹은 한 지인네도 아기가 생겼다고 했다.
암튼 그 얘기가 제법 알려졌던지. 내가 심부름을 가면 집안 어른들은 ‘저놈이 참 귀한 놈이여. 저놈이 아들 겸 딸 겸 그래’ 하며 잘해 주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라면서 남자 여자 구분하는 것을 싫어했고, 나 스스로 딸이자 아들이라는 생각을 하며 자랐다.
우리집은 광주 금남로 5가에 있었고, 금남로 4가에 외가가 있어 가까이 오가며 지냈다. 수창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태평양전쟁 말기여서 일본군의 전시물품 조달을 위해 솔방울을 주우러 다니곤 했다. 고학년은 관솔을 따고 저학년인 우리는 솔방울을 주워서 커다란 자루에 채워 보냈다. 어쩌다 마주치는 일본인 교장은 늘 긴 칼을 차고 있었다. 도시락을 싸올 형편이 안 되는 친구들은 오이 같은 채소를 가져와 먹기도 했는데 그나마 못 가지고 온 친구들도 많았던 궁핍한 시절이었다.
10살, 수창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내 기억 속의 해방 풍경은 역마다 떠나는 사람, 돌아오는 사람들로 굉장히 북적대고 분주했다. 특히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일본 사람들 모습이 선명하다.
해방된 뒤 미군정기에는 미군들이 차를 타고 지나가며 과자며 껌 따위를 던져주곤 해서 나 역시 애들에 섞여 따라다니곤 했다. 일제 때나 그때나 먹을 것이 별로 없었고, 과자라 해야 왕방울 같은 눈깔사탕 정도였으니 애들은 미군 차만 보면 무조건 쫓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외숙(최창진 선생)께서 나와 외사촌동생 셋을 방으로 불러 모으셨다. 외사촌동생은 모두 다섯인데, 그 무렵에는 아직 셋이었다. 여동생(최양의·8살)과 남동생 둘(최양재·6살, 최양우·3살)이었다. 방으로 가니 평소에도 단호한 표정인 외숙께서 엄한 목소리로 꿇어앉으라 했다. “너희들 미국 군인들이 던져주는 과자 호주머니 속에 있으면 다 내놔라.” 외숙 표정으로 보아 하나라도 감춰놓으면 안 되겠기에 전부 꺼내 놓았다. 내 호주머니엔 껌 한 통이 있었고, 동생들도 비스킷이며 과자를 꺼내 놨다. “더이상 없지?” 우리는 영문을 몰라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그러면 너희들 일어서! 앞에 놓인 과자와 껌 주워라. 그거 다 변소 똥통에 버리고 와라.” 그 시절 다른 집들과는 달리 집 안에 딸려 있던 화장실로 줄지어 간 우리는 껌과 과자를 모두 던져버리고 왔다.
그런 다음 또다시 우리를 무릎을 꿇리고 앉힌 외숙께서는 화를 내진 않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목소리로 “미국 군인들이 던져주는 것 주워 먹으면 안 된다. 그러면 거지와 똑같다. 앞으로는 절대 주워 먹지 말고 줘도 받지 마라!” 어찌나 단호하게 들렸던지 우리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예” 하고 답하고는 나왔다.
나는 창피한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어린 나이에도 외숙의 말씀이 참 좋은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나와 사촌동생들은 다시는 미군 차를 따라다니지도, 미군 과자를 받아먹지도 않았다. 그 이전에는 별다른 기억이 없는데 이때 외숙에 대해 강한 믿음이 내 마음에 자리하게 된 듯싶다. 자존심이 무엇인지를 배운 잊을 수 없는 계기였다. 구술정리/이경희
그런 다음 또다시 우리를 무릎을 꿇리고 앉힌 외숙께서는 화를 내진 않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목소리로 “미국 군인들이 던져주는 것 주워 먹으면 안 된다. 그러면 거지와 똑같다. 앞으로는 절대 주워 먹지 말고 줘도 받지 마라!” 어찌나 단호하게 들렸던지 우리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예” 하고 답하고는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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