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여고 시절 친구 8명이 모여 ‘에버래스팅 그룹’을 만들어 영원한 우정을 다짐하는 뜻에서 저마다 한복을 차려입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국전쟁 직후의 혼란과 궁핍 속에서도 꿈과 우정을 키운 아름다운 추억의 장면이다. 앞줄 가운데가 필자다.
[길을 찾아서]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④
1954년 고3이 되자 대학 진학을 생각하고 있던 나로서는 농구선수 생활이 걱정됐다. 그때 나는 ‘등번호 9번’으로 주장을 맡고 있었고, 포지션은 센터였다. 농구부에서 대학에 가려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선수생활을 하려면 당연히 합숙훈련을 해야 했고, 진학반은 지금처럼 밤 12시까지는 아니지만 여름방학 중에도 학교에 나와 공부를 해야 했다.
고민 끝에 농구 담당인 수학 선생님을 찾아가 입시 준비를 위해 농구를 그만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얘기를 하자마자 선생님한테 얼마나 야단을 얻어들었는지 모른다. ‘대학도 중요하지만 학교를 대표하는 선수인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요즘 같으면 당장 학부형들이 쫓아와 ‘우리 아이 책임질 거냐’고 항의할 일이지만, 그때는 ‘선생님 말씀이 곧 하늘이던 시절이라’ 나는 순순히 물러나 그때부터 합숙을 했다. 고3은 고3인데….
하지만 코피 흘리며 시작해 고3 때까지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나는 지금도 환희롭게 생각한다. 우선 건강이 굉장히 좋아져, 운동을 하면서 6년 연속 우등상을 받은 유일한 학생이었다. 아버지의 의도가 딱 들어맞은 것이다. 고3 때는 한 은행에서 우리 농구팀 전부를 채용하겠다는 제의도 받았다. 내가 대학 진학을 원해서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비록 한국전쟁 직후 피폐한 시절이었지만, 그때 학교 풍경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6교시가 끝나고 7교시가 있을 때도 있지만 정규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 단연 활기가 돌았다. 농구장, 배구장, 테니스장 등 코트마다 선수들이 모여 연습하고 시합하고. 또 음악실에서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왔고, 미술실에서는 화가 지망생들이 솜씨를 겨루고, 가정실습실에서는 요리하는 맛난 냄새가 풍겨나왔다. 학교마다 방과후가 되면 완전히 살아 움직였다. 다른 학교와 운동 시합이라도 하는 날이면 전교생이 응원을 했다. 응원단장의 손짓에 맞춰 교가도 부르고 응원가도 부르며 열정과 생기가 넘치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사실 어릴 적부터 내 꿈은 의사였다. 아버지도 한때 교사생활을 하셨지만 늘 의대를 가라고 권했다. 아버지는 약대도 안 되고 꼭 의대여야 한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들도 늘 의사가 되라고들 했기에 의심의 여지 없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랬는데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칠 무렵, 담임 문기상 선생님이 하루는 ‘해숙아, 너는 의대보다는 국제여류기자가 되면 아주 잘 맞을 것 같다’고 권하셨다. 그러면서 ‘오늘부터 불어를 배워라’ 하시는 것이었다. ‘국제’란 단어조차 생소한데 국제여류기자라고? 선생님 조언에 자극을 받은 나는 독일어로 선택했던 제2외국어를 불어로 바꾸고는 당장 전남도청 앞 불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수업과 청소를 마친 뒤 1시간 비는 시간에 학원에 갔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와 농구 훈련을 하는 강행군이었다.
아침 등교하기 전에는 금남로 집 근처에 있는 타자학원에서 한 시간씩 타자도 배웠다. 그런데 웬일인지 친구들이 나를 보고 막 웃는 것이었다. 자꾸 끊기는 테이프를 잇느라 잉크가 묻은 손으로 무심코 얼굴을 문지르는 바람에 시커먼 얼룩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름 시간 활용을 잘하며 학창시절을 상당히 보람있고 역동적으로 보낸 셈이다. 시간을 쪼개 뭔가를 배웠고,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면 열심히 해냈다.
사실 아버지(정익진)는 광주사범을 나와 내가 태어났을 때 평동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는 사범대를 나오면 일정기간 의무적으로 교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책이 귀한 때였지만 아버지는 내게 책을 많이 사주셨고 나도 책읽기를 무척 좋아했다. 유치원 들어갈 때는 상아로 된 아주 얇으면서도 희귀한 모양의 도장을 선물로 주셨는데 지금까지 70년째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인감도장으로 쓰고 있다.
어머니(최인순)의 별명은 ‘얌전이’였다. 말이 별로 없는데다 음식 솜씨는 물론 바느질도 잘해서 집안 대소사 때마다 불려 다니실 정도였다. 어머니가 지어준 색동옷을 입고 나가면 지나는 사람마다 뒤돌아볼 정도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나는 ‘얌전하다’는 그 소리가 싫었다. ‘아이고 얌전이 딸 왔구나’ 하며 모두들 대접을 해줬지만, 늘 일만 하시는 어머니 모습을 보는 게 어린 마음에 싫었던 모양이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사실 아버지(정익진)는 광주사범을 나와 내가 태어났을 때 평동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는 사범대를 나오면 일정기간 의무적으로 교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책이 귀한 때였지만 아버지는 내게 책을 많이 사주셨고 나도 책읽기를 무척 좋아했다. 유치원 들어갈 때는 상아로 된 아주 얇으면서도 희귀한 모양의 도장을 선물로 주셨는데 지금까지 70년째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인감도장으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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