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7월 광주 계림동 집의 정원에서 외할머니(문흥래)를 모시고 외사촌 동생들과 함께. 맨 왼쪽이 필자, 맨 오른쪽이 최양우씨. 그 무렵 하숙집을 운영하던 어머니가 화병으로 쓰러져 몸져눕자 칠순이 넘은 외할머니는 외숙네를 오가며 두 집 살림을 도맡아 해냈다.
[길을찾아서]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⑦
외숙(최창진)의 생각과 사상은 나와 사촌동생들에 대한 교육과 진로 지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외숙의 큰아들(최양재)은 1960년대 중반 서울대 상대를 졸업했는데, 당연한 출세 코스였던 한국은행이 아니라 농협으로 입사했다. 농민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곳으로 가라는 부친의 권유를 따른 뜻밖의 선택이었다. 61년 설립된 농협은 반듯한 사옥도 없어 임대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신생 기관이어서 다들 의아해했다.
일본어를 공부하고 싶어하는 막내딸(최양민)이 대학을 갈 때도 외숙은 일어 대신 중국어과를 선택하라고 권했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 또래 아이들은 운동장이나 골목길에서 고무줄넘기나 오자미잡기 놀이를 할 때 무심코 일본 노래를 불렀는데 외숙은 그럴 때마다 내게 일본말이니 더는 쓰지 말라고 주의를 주곤 했다. 해방되는 해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일어 시간에 ‘히라가나’는 물론이고 ‘가타카나’도 배웠지만, 이후 자라면서 나는 친구들에 비해 일어를 잘 못하는 편이었다. 나는 그 이유가 외숙의 단호한 가르침 때문이라고 내심 핑계 아닌 핑계를 대곤 했다.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로 일어까지 싫어했던 외숙은 대신 70년대 초 에스페란토어 사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에스페란토어는 폴란드 출신 안과의사인 자멘호프가 창안한 세계 공용어로, 서로 다른 언어가 곧 분쟁의 원인이 되는 것을 발견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용하는 언어만 있으면 평화로워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창안했다고 들었다. 외숙은 강대국의 말을 배우게 되면 속국이 생기고 식민지가 생기지만 서로 같은 말을 쓰게 되면 상호이해와 인류평화를 꾀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 덕분에 나는 60년대 중반쯤부터 에스페란토어를 알게 되었고, 퇴근하면 광주시내의 학원에서 한동안 에스페란토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때 우리나라에는 유일하게 대구의 청구대학에만 에스페란토어과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2차대전에서 패망한 뒤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영어나 프랑스어 같은 강대국의 언어를 쓰는 대신 에스페란토어를 많이 보급하고 유행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전쟁 특수를 딛고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면서는 일본은 일본어를 전세계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79년 국제도서관협회연맹(IFLA) 총회 참석차 유럽을 방문했을 때 일본인들은 이미 가족 단위로 여행을 많이 왔고, 호텔을 비롯해 가는 곳마다 일본어 안내문이나 안내서를 준비해놓기도 했다.
1910년생인 외숙은 에스페란토어 사전을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채 72년 여름 눈을 감으셨다. 말년에는 우리 집에 머물렀는데 책상 앞에 꼿꼿이 앉아 작업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외숙이 지향했던 생각이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며 젊은 날을 보냈다.
외할머니는 참 지혜로운 분이셨는데 말로 표현하기가 모자랄 뿐이다. 그 시절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러했고, 더구나 큰딸이었던 외할머니는 학교교육을 받지 못해 글은 몰랐지만 말로 하는 표현력은 참 좋았다. 구술로 전해온 이야기나 표현을 적재적소에 잘 적용했는데 너무나 이치에 맞고 지혜로워서 사촌동생 양부는 대학시절 외할머니 말씀을 받아 적기까지 했다. 외할머니가 뭔가 말씀을 시작할 때면 ‘할머니, 할머니. 잠깐만, 잠깐만’ 하며 받아쓸 준비를 하고는 턱밑에 앉아 기다릴 정도였다. 친척들이나 주위 분들이 그렇게 지혜로우시니 외숙 같은 큰 자식을 낳았나 보다고들 했다.
외할머니는 어떠한 상황에도 서두르지 않고 대범했다. 나와 사촌동생 다섯을 키웠고, 내가 결혼해서 어렵게 생활할 때는 우리 아이들, 그러니가 외증손주들까지 돌봐주었다. 어머니가 쉰살 때 쓰러져 반신불수가 됐을 때도 ‘니가 무슨 죄가 있느냐. 내가 돌볼란다’ 하시며 우리 집으로 와서 함께 지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3살 때 일찍 돌아가셔서 기억에는 없지만, 손자가 나 한명밖에 없던 때라 ‘어쩌다 이놈을 보고 간다’며 내 손을 꼭 잡아줬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83년 98살에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외숙 남매를 모두 앞세우신 까닭에 외할머니는 내게 ‘나 죽으면 느그 어머니 대신 나한테 어머니하고 크게 한번 불러라’ 하시곤 했다. 하지만 나는 임종 순간 외숙모님이 옆에 있어 속으로만 불렀다. ‘할머니! 어머니! 할머니!’ 하고. 물론 능력 있는 손자, 손녀들이 큰 울타리가 되어 있었지만 외롭게 가시는 외할머니의 아픔이 마음에 남아 있다.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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