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입학해 1년 휴학한 뒤 복학한 1957년 전남대 의대 교정에서 120명 중에 4명 뿐이었던 여학생들끼리 모였다. 맨오른쪽이 필자. 어려운 가정 형편과 어머니 병수발로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 본과 1년 때 중퇴한 까닭에 거의 유일한 대학시절 사진이다.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⑧
1953년 광주여고 2학년 때부터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납부금을 제때 내지 못할 만큼 집안형편이 어려워졌다. 고3 때도 마찬가지여서 어릴 때부터 키워왔던 의대 진학의 꿈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6년제 의대 등록금과 그 이후 수련의까지 장기간 교육비를 감당할 길이 없다는 생각에 서울대 사대에 원서를 냈다. 그런데 아버지의 반대로 약학대학으로 방향을 바꿔 이화여대 약대에 다시 지원했다. 그런데 막상 합격을 하자 아버지는 경제력도 없으면서 이마저 반대했다. 실력도 갖추고 좋은 일도 할 수 있는 의사가 돼야지 의사 처방에만 따라야 하는 약사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 고집대로 서울의 이대를 가려 해도 등록금은 물론 학교 기숙사비도 감당할 길이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전남대 의대 치의예과로 진로를 돌려야 했다.
유치원 때부터 단짝으로 광주여중 입학 때 함께 원서를 냈던 친구 강경례는 이대 약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입학식을 앞두고 서울로 가는 경례를 전송하기 위해 광주역까지 나갔는데 만나는 순간부터 목이 메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나는 떠날 때까지 손만 붙잡고 한마디도 못했다. ‘해숙이가 대학 진학조차도 힘든 상황에서 몹시 마음이 아프겠구나’ 경례도 내 마음을 미뤄 이해했으리라 믿고 혼자 되돌아오면서 ‘운명의 길이란 이런 것인가’ 싶은 생각에 내 처지가 새삼 기막혔다.
55년 3월 전남대 치의예과에 입학했지만 첫 등록금도 내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살림은 계속되었다. 그때만 해도 장학금 제도가 별로 없던 시절인지라 어머니가 친척 아저씨한테 융통해 겨우 등록금을 마련했지만 밀려 내기 일쑤였다. 사는 곳도 금남로에서 계림동 셋집으로 옮겨야 했다. 어느 경찰서장 소유의 집이었는데 처음엔 상하방만 빌려 살았다. 아버지는 사업 재기를 위해 집을 떠나 있었고, 어머니와 둘이 먹을 것도 땔감도 없이 냉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견뎌야 했다. 그해 겨울 어머니마저 몸져 눕자 나는 1년 만에 휴학을 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집주인인 경찰서장네는 참 선한 사람들이었다. 땔감이 없어 냉방에서 어머니와 추위를 견디고 있을 때 서장의 어머니가 화로에 장작나무 숯불을 가득 채워 갖다 줘서 그 온기로나마 추위를 이기곤 했다. 그러다 57년 서장이 지방 소도시로 발령이 나 그곳 관사로 이사하게 되면서 우리에게 집을 다 쓰라고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우리가 빌려 썼던 상하방에 하숙을 치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어머니는 또다시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됐고, 말도 전혀 하지 못했다. 그 무렵 내가 냉방에서 지내다 감기가 몹시 심하게 걸려 이불을 둘러쓰고 누워 있었는데, 소심한 성격인 어머니로서는 가세가 기울어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제대로 뒷바라지도 못할 만큼 어려움을 겪게 되자 고민이 깊었던 모양이었다. 그 고민을 혼자 끌어안고 있다가 중치가 막혀 쓰러졌던 것이다.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양방이며 한방이며 모든 좋다는 방법으로 치료를 시도해 봤지만 어머니는 차도가 없어 이후 3년 동안 나는 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다.
1학년 때 휴학했던 1년 사이에 치대와 의대가 통합돼 57년 의대로 복학한 나는 후배들과 의예과를 함께 다녔다. 엎친 데 덮친다고, 점점 힘들어지는 상황을 같이 짊어질 형제도 없이 혼자 감당해야 했기에 나의 대학생활은 지금도 굉장히 우울한 잿빛으로 남아 있다. 그마저도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본과 1학년 때 또다시 휴학을 했고 끝내 되돌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쓰러진 어머니는 12년 가까이 말 한마디, 내 이름 한번 불러보지 못한 채 66년 5월 환갑을 겨우 넘기고 고단한 삶을 마치셨다. ‘삶을 그대로 받아들여 살다가 잊어버린 채로 되돌아갔다’고 했던가. 그땐 나도 결혼해서 두 아들을 둔 어머니였고 교사로서 자리도 안정된 때였지만, 견딜 수 없는 회한으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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