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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찾아서] 감독없는 시험, 양심지킨 낙제…‘제물포의 산 교육’ / 정해숙

등록 2011-06-01 18:30수정 2011-06-03 15:09

1956년 개관 때부터 개가식 운영의 성공사례로 화제를 모은 인천 제물포고교 도서관의 70년대 풍경. 필자는 64년 사서교사 교육 때 견학 갔던 제물포고교의 사례에서 교사로서 큰 영감을 얻었다.
  사진 제물포고 총동창회 제공
1956년 개관 때부터 개가식 운영의 성공사례로 화제를 모은 인천 제물포고교 도서관의 70년대 풍경. 필자는 64년 사서교사 교육 때 견학 갔던 제물포고교의 사례에서 교사로서 큰 영감을 얻었다. 사진 제물포고 총동창회 제공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⑬
 1964년 7월부터 8월까지 여름방학 동안 이화여대에서 전국에서 모인 교사들과 함께 문교부 지정 사서교사 양성교육을 받았다. 이 교육은 도서관 담당 자격증을 얻을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당시에는 이화여대와 연세대 두 곳만이 문교부 지정 교육기관이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내내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도 하고 싶었던 일이어서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다녔다.

 사서교육 과정의 하나로, 선진사례 견학차 방문한 인천의 제물포고등학교에서 나는 이상적인 교육의 한 전형을 발견했다. 제물포고가 위치한 지대는 상당히 높았는데 도서관은 더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3층짜리 별관이었는데 56년에 신축해 비교적 새 건물이었다. 그때 이미 정식발령을 받은 사서교사가 4명이나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교사가 우리를 층마다 안내하며 설명해 주었다.

 1층은 참고열람실과 일반열람실로 완전 개가식이었다. 도서관 운영 방식에는 개가식·반개가식·폐가식·반폐가식이 있는데, 개가식은 열람자가 서고에 들어가서 원하는 책을 자유롭게 찾아볼 수 있는 방식이다. 제물포고는 일반열람실은 개가식으로, 참고열람실은 사전류가 있어서 직원이 입구에 앉아 책가방을 갖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정도의 관리만 하는 형태로 운영하고 있었다.

 2층에 올라가니 꿈만 같았다. 한쪽은 음악감상실인데 넓은 공간에 여럿이 앉아 같은 음악을 듣는 형태가 아니라 개별로 음악을 신청해 이어폰을 끼고 감상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 한쪽은 영화감상실로 요일별 상영 영화 계획표를 도서실 입구에 붙여놓았다. 겨우 책장 한두개가 서고의 전부인 학교가 태반이던 시절에 도서실에 음악감상실과 영화감상실이라니! 학생들을 위한 산 교육의 현장을 본 듯해서 나는 행복감에 젖었고, 제물포고는 그때부터 내게 환상의 대상이 되었다.

 3층은 완전 자습실로 3학년만 출입할 수 있었다. “밤늦도록 도서관 1, 2, 3층 전체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으니까 인천시민들이 제물포고 도서관을 인천의 등대라고 합니다.” 안내해준 사서교사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그다음 설명이 더 재미있고 환상적이었다. “도서관을 개가식으로 운영했는데 책 분실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장 선생님(이창갑)께서 몇 년간 개가식 운영을 해본 다음 단호하게 무감독 고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이 시험지만 나눠주고 학생들이 자유롭게 시험보도록 교무실로 돌아왔다가 시험시간 끝나기 10분 전쯤 다시 교실에 가서 시험지를 걷어 오면 된다는 것이다.

 무감독 고사는 과연 성공했을까. “처음 무감독 고사에서 낙제생 6명이 나왔어요. 그래서 교장 선생님이 그 6명을 교장실로 불렀어요.” 어떻게 됐는지 호기심이 생겼다. “담임과 함께 교장실로 불려간 애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자 교장 선생님은 담임들을 교무실로 가도록 하고는 얘기를 나눴어요. ‘고개 드세요. 여러분은 잘못이 없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교육은 바로 여러분과 같은 학생을 키워내기 위한 교육입니다. 고개 드세요.’ 학생들이 의아해서 고개를 들자 교장 선생님이 되물었죠. ‘감독 선생님도 안 계시는데 어째서 낙제점수를 얻었지요?’ 우물쭈물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양심에 따라 아는 대로 쓰다 보니 그랬어요’라고 답을 했구요. 그러자 교장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바로 그겁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교육의 목표는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학교 도서관을 개가식으로 운영한 것도 양심교육을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 결과 분실된 책이 많지 않아 또 무감독 고사를 실시했습니다. 얼마든지 커닝을 할 수 있는데도 양심을 지켜서 낙제점수가 나왔습니다. 점수가 문제가 아니라 양심을 지키는 교육. 나는 여러분들 같은 학생을 만난 것이 너무 기쁩니다.’ 그 표정이 무척이나 상기돼 있었죠.”

 교장 선생님은 이 내용을 직원회의에 보고하고 ‘중·고등학교에는 재시험 제도가 없지만 이 학생들에게는 재시험 기회를 주자’고 제안해서 그 학생들을 구제했단다.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그 분은 바로 길영희(1900~84) 선생이셨다. 제물포고 초대 교장으로 경성의학전문대학 1학년 때 3·1운동에 학교대표의 1인으로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해방 후 인천중학교가 설립되자 인천시민들의 결의로 초대 교장에 부임했고, 50년 6-3-3-4 학제개편으로 설립된 제물포고의 교장을 겸임했다. 선생의 교육철학은 ‘한국교육이 정치가들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육자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물포고에서 들은 한마디 한마디는 기가 막혔다. ‘진짜 교육이 이것이다!’ 확인한 순간이었다. 표현하기 힘든 환희로움은 이후 내 교사생활의 지표처럼 나를 이끌어 주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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