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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찾아서] 여자란 이유로 도서관 대회 출장 불허 / 정해숙

등록 2011-06-02 18:40

1966년 봄 광주 전남여고로 발령을 받은 필자(한가운데)가 그해 6월 도서관에서 학생들과 함께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전라남도 사서교사 1호’로 전남여중·고생이 함께 이용하던 도서관의 운영을 맡던 시절이다.
1966년 봄 광주 전남여고로 발령을 받은 필자(한가운데)가 그해 6월 도서관에서 학생들과 함께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전라남도 사서교사 1호’로 전남여중·고생이 함께 이용하던 도서관의 운영을 맡던 시절이다.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⑭
송정중학교에서 2년6개월 남짓 근무한 뒤 1965년 강진 성전중학교로 전근을 갔다. 정식교사로 첫 발령을 받았고 사서교사 자격증도 받았다. 그런데 바로 이듬해 광주 시내인 전남여고로 발령이 났다. 그때만 해도 도시 학교로 옮기기 위해서는 여러 곳에 부탁을 해야 한다고들 했지만 나는 누구한테도 전근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심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1년 전의 우연한 만남이 떠올랐다.

송정중학교 근무 막바지 시기인 65년 1월 초부터 2월 초순까지 한달 남짓 여름방학에 이어 겨울방학에도 사서교사 자격 강습을 받았다. 이화여대에서 강습을 마치고 내려오는 기차에서 노신사를 만났다. 그때는 서울에서 광주까지 고속버스가 없던 시절이었다. 창가에 먼저 자리잡고 앉아 있는데 옆자리에 나이 드신 분이 오시기에 일어나 외투를 받아 걸어드렸다. 인사만 하고서는 가만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대전쯤에서 노신사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학교에 근무하세요?’ ‘송정중학교에 계세요?’ 내가 읽고 있던 책에 ‘송정중학교’라는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무슨 과목을 맡고 있느냐’ ‘무슨 일로 갔다 오느냐’ 계속 물어서 ‘사서교사 강습을 받고 오는 길이고, 자격증은 나중에 학교로 보내준다고 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내 이름 등을 묻던 그는 ‘정병택 학무국장’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렇게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아마도 그때 내 얘기를 들은 정병택 국장이 배려를 해준 게 아닐까 짐작이 들었지만, 물론 직접 확인해보진 않았다.

나는 ‘전라남도 사서교사 1호’로 전남여고에 정식 발령을 받았는데 사서교사는 담임은 안 맡았지만 수업은 해야 하기에 중학교 2학년 수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도서관은 전남여중·고 교직원과 전교생이 같이 이용하는 공간이었다. 문교부 지정 연구학교로 전담 보조사서가 3명 있었고, 나는 총책임을 맡아 제물포고에서 감동깊게 봤던 대로 완전개가식으로 운영했다.

나의 하루는 도서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총류, 철학, 사회과학, 순수과학, 기술과학, 어학, 문학, 역사 등으로 분류된 서가를 둘러볼 때마다 책 속의 인물과 사건들을 만나는 것 같아 생동감이 일었고, 행복감에 젖었다. 여러 가지 자료도 전문적인 분류방법을 익혀 작업했다. 중요한 사건이나 사안별로 카드를 만들고, 카드상자에 그 사건이 실린 신문과 잡지, 책 등을 함께 분류해 넣어 놓는 것이다. 학생이나 선생님들이 자료를 찾을 때, 며칠치 신문과 책을 함께 모아서 주거나 메모해 주면 무척 좋아했다. 나의 일과는 신문과 잡지, 각종 책들에 묻혀 기초작업을 하느라 쉴 틈 없이 바빴지만 그 일이 너무 행복하고 뿌듯했다.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기본적인 학습자료를 제공하는 사서교사의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입버릇처럼 강조한다.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개가식 운영을 해보니, 우리 학교에서도 역시 책 분실 사고가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다. 간혹 무심코 가지고 가다 돌려놓고 가거나, 잊어먹어서 반납하지 못한 때도 있었지만 역시 많지는 않았다. 개가식 운영으로 오히려 학생과 선생님들의 도서관 이용이 활발했고, 그러다 보니 책이 쉽사리 낡았다. 간혹 장학지도를 할 때 깨끗한 책들을 보고 ‘잘 보관했다’며 좋은 평가를 하는 사례가 있었는데 도서관의 책은 낡을수록 많이 이용하고 읽힌 것이란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해서 아쉬웠다.

그해 5월 제주도에서 전국도서관대회가 있다는 공문이 학교로 왔다. 그런데 출장신청서를 제출했더니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여교사라서’였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여성을 교육하는 현장에서 여교사이기 때문에 도서관 담당자가 참석해야 할 도서관대회에 참석할 수 없다니…. 다시 한번 출장 신청을 했는데도 불허였다. 그래서 나는 서무실에 연가신청서를 제출하고는 자비로 참석해버렸다. 그 순간 어떻게 연가신청서를 낼 생각이 떠올랐을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다. 그렇게 다녀오니 학교에서 뒤늦게 출장비를 지급해줬다. 사후 허락을 받은 셈이었다.

아무튼 ‘여교사 출장 불허 방침’은 내가 처음 학교 행정에 반기를 든 잊혀지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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