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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찾아서] 유신정권 예산으로 만든 부조리극 ‘공모살인’ / 정해숙

등록 2011-06-06 19:57수정 2011-06-06 21:48

1972년 12월 전남중등여교사회에서 주최한 예능발표회의 연극 <공모살인>에서 필자(오른쪽)가 주인공인 과외교사 역을 맡아 남장을 한 채 연기하고 있다. 불과 4일 전에 대타를 맡았으나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던 특별한 경험이다.
1972년 12월 전남중등여교사회에서 주최한 예능발표회의 연극 <공모살인>에서 필자(오른쪽)가 주인공인 과외교사 역을 맡아 남장을 한 채 연기하고 있다. 불과 4일 전에 대타를 맡았으나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던 특별한 경험이다.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16
1972년 8월 결성된 전남중등여교사회는 첫 행사로 그해 12월 겨울방학 때 중등 여교사 예능발표회를 하기로 했다. 정부는 여교사회에 예산 지원을 했고, 가끔은 정치권에서 유신헌법이야말로 나라를 살리는 가장 바람직한 헌법이라는 내용의 선전물을 보내오기도 했다. 예능발표회에도 예산이 지원됐고, 음악·무용·연극 등 여러 분야 공연을 하기로 해서 한달 남짓 준비를 했다.

특히 연극은 교사들이 하는 작품인 만큼 교육 관련 내용이어야 한다는 모두의 의견에 따라 희곡 <공모살인>(김용낙 작)을 선택했다. 교육현실의 모순과 사회부조리를 고발하는 내용으로 엄마와 딸, 과외교사가 등장했다. 여학생은 예쁘장한 불어 선생님이, 과외교사는 가정 선생님이 맡아서 날마다 퇴근한 뒤 전남여고에 모여 연습을 했다. 과외교사는 남자 분장을 해야 했고 대사도 제일 많은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발표 일주일도 채 안 남은 시점에, 갑작스레 과외교사 역을 맡기로 했던 가정 선생님이 도저히 못하겠다며 물러나버렸다.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연습해온 선생님을 다독여 진행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으나, 끝내 설득이 안 됐다. 그러자 주위 선생님들이 다른 대안이 없다며 돌연 나더러 대신 하라고들 했다. 주인공 역을 불과 사흘 앞두고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더 버틸 수 없어 받아들였다. 참 무모하다 싶었지만 공연을 취소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막상 수락은 했지만 그 많은 대사를 외우는 것도 문제였고, 대사는 외운다손 치더라도 장면마다 표정이며 몸동작이며 난생처음 연기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수를 각오하고 무대에 올랐다.

다행히 공연이 끝나자 잘했다고들 칭찬해줬다. 머리는 딱 달라붙도록 기름을 바르고, 알 없는 굵은 테 안경에 남자 양복 차림이었다. 그나마 키가 크니 남자 양복이 제법 그럴듯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대사를 하다 막히면 안경을 올리는 시늉을 했는데 오히려 그게 자연스럽게 보였다고들 했다. 극성스런 엄마에게 딸과 과외교사가 들볶이다 결국 딸도 과외교사도 지쳐 쓰러지는 장면을 연출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을 짓누르는 교육현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참 무겁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60년대 초반부터 정부는 인구 증가가 사회발전을 저해한다며 산아제한을 장려했다. 학교에도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 아래 출산정책 홍보 공문이 계속 날아왔다. 그런데 현장의 제도나 인식에는 변화가 없었다.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그런 어느 날 수업이 끝난 뒤 열린 직원회의 자리였다. 오랜 시간 진행된 회의 내용 중에 친목회 활동 보고와 친목회 회칙에 관한 사항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애경사 관련 내용을 들어보니 문제가 느껴졌다. 남자 교사의 친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1이면 그 장인 장모일 때는 1/2을 지불하는데, 결혼한 여성 교사의 친부모일 때는 1/2, 시부모일 때는 1을 지불한다는 규정이었다. 그때까지 그렇게 시행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당하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남여고는 여성교육을 하고 있는 현장인데 어떻게 여선생님에게 지급되는 친목회비가 남선생님의 절반입니까? 더구나 아들딸 구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정부 시책에 따라 학생들에게 홍보하고 가르치면서 정작 선생님들의 친목회 회칙이 불평등하게 돼 있다는 것은 문제지요. 바람직한 방향으로 고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교감 등 여교사 18명을 비롯해 교직원 60명 중 어느 누구도 내 발언에 동조하지 않은 채 침묵만 흘렀다. 그러자 이대로 당시 교장 선생님은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면서 회의를 마무리했다. 단 한 사람의 반론도 없이 회의는 끝났다.

그런데 이튿날 출근하자마자 교감 선생님이 부르시더니 “정 선생 같은 바보가 서울에 또 있네” 하는 것이었다. “여기 봐봐” 하며 신문을 보여주는데 서울의 고교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제기됐다는 기사였다. 이 기사를 보고 교장 선생님을 포함한 친목회장단이 회의를 했다고 했다. 다음날 간사인 물리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친목회장단이 두차례 회의했는데 정 선생님이 제안한 내용으로 회칙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그 대신 다른 학교에는 절대 소문나지 않도록 부탁합니다.” “잘됐네요. 그런데 다른 학교에도 널리 알려 바꿔야지 왜 말하면 안 돼요?” 우연의 일치로, 조간신문 기사의 힘을 얻어 불합리한 규칙을 바꾼 조용한 저항의 승리였다고나 할까. 참 오래전의 풍경이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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