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3월 당시 박근혜(가운데) 구국여성봉사단 명예총재가 새마음운동의 하나로 설립한 경로병원 개원식에서 최태민(왼쪽) 봉사단 총재와 함께 했다. 전남중등여교사회 회장을 맡고 있던 필자는 78년 11월 광주에서 열리는 새마음갖기 행사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불참했다.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18
유신헌법 선전과 통과를 목적으로 설립된 여교사회는 유신헌법 통과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고, 나는 전남여고에 있던 1975년 전남중등여교사회 2대 회장을 맡게 되었다. 친목회 회칙 문제, 광주지역 학생 독서클럽 지도 문제, 반공궐기대회 등을 겪으면서 맹종을 강요하는 군부독재 아래에서 교사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면 윗사람한테 찍히고, 국가에 의해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어야 하니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교사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나서지 않으면 문제는 개선되지 않을 뿐 아니라 더구나 우리 교사들은 미래의 주인공인 학생들을 양심있는 인재로 키워야 할 책무가 있지 않은가?
이런 고민을 하면서 여교사회 회장을 맡은 이듬해 <여교사회보>를 창간했다. 교육에서 여교사들의 역할과 위치가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여교사들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고, 여성 특유의 따뜻함과 지혜로 교육의 역할을 사회로 넓혀가자는 취지에서였다. 각 학교 대표들의 모임을 자주 했고, 간부들을 통해 회보를 만들 편집위원으로 이경희(광주여상고)·서용자(전남여고) 선생을 추천받아 구성했다. 회보는 알찬 내용으로 채워졌고, 나는 회장으로서 회보에 대해 나름의 긍지를 가졌다. 76년 2월 여교사회에서는 300여명의 회원(당시 전남지역 전체 여교사는 1천여명)을 대상으로 ‘전남도내 여교사 의식구조’를 조사하기도 했다. 그 결과를 보면 당시 여교사들의 문제의식을 알 수 있다. 직업관, 학생관, 사회관을 알아본 것인데 ‘균등한 기회’ ‘교육정책 일관성’ ‘인간교육 강화’ 등을 꼽았다.
전남여고에서 꼬박 10년을 채운 76년, 근무연한 제도가 바뀌어 목포여고로 발령을 받았다. 그동안에는 교장 내신에 의해 연한에 관계없이 근무했는데, 그때부터 한 학교에는 5년 이상, 한 지역에는 10년 이상 근무할 수 없다는 제도가 신설된 것이었다. 목포여고 근무 1년 동안 사촌여동생 부부(정공자·김규조)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어릴 적 가본 목포에서는 물이 귀해 물지게를 지고 다니는 사람을 많이 봤는데 그때는 물 사정이 괜찮아서 다행이었다.
이어 광주 북성중학교로 옮겨온 78년 겨울 어느 날이었다. 교무주임이 ‘선생님이 보셔야 한다’며 공문을 들고 왔다. 읽어보니 박근혜 당시 구국여성봉사단(훗날 새마음운동본부) 총재가 광주 실내체육관에서 ‘새마음갖기대회’인지 ‘새마음중고생연합회 발대식’인지를 하는데 참가자로 내 이름을 지명해 놓은 것이었다. 학교와 대학별, 직장별로 일부 교사를 참여토록 했는데 우리 학교에서는 나 한명이었다. 육영수 피살 이후 27살의 박근혜가 맏딸로서 대통령 영부인 구실을 하던 때였는데, 그는 최태민 목사와 함께 구국여성봉사단 이름으로 전국을 돌면서 ‘충·효·예’ 정신문화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공문을 보자마자 가기 싫다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교무주임은 이름이 명시된 공문이어서 자기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담당 장학사를 확인해서 그 자리에서 전화를 했다. “북성중 정해숙입니다. 오늘 공문 받았습니다.” “그래요. 공문에 날짜 있으니 잊지 말고 전날 예행연습과 본행사에 나오세요.” “장학사님, 저는 가기 싫은데요.” “아! 선생님. 다들 서로 가고 싶어 하는데도 교육청에서 정 선생님을 지명했는데 가셔야지요.” “아니요. 가고 싶어 하는 분 있으면 대신 보내주세요.” “안 됩니다. 명단이 이미 기관에 올라갔습니다.” ‘기관’에서 알고 있다는 얘기에 일단 전화를 끊었다. 그때는 교무실에 교감 책상에만 전화가 있었서 통화 내용이 고스란히 상부에 보고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예행연습 날이 되었다. 하지만 도저히 갈 수가 없어 도서관 직원에게 ‘대리 출석’을 부탁했다. ‘정해숙!’을 부르면 ‘예’라고 대답만 하고 오라고 당부했다. 퇴근시간이 조금 지나자 예행연습에 갔던 직원이 돌아와 “총재님이 오시는 내일은 복장을 곤색이나 검정색 정장을 하고 오라 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는 언제 경례를 하고, 언제 자리에 앉는지 등등 예행연습한 내용도 알려주었다. 충효예를 내세운 행사에서 27살의 젊은 총재가 퇴장할 때 환갑을 바라보거나 넘은 교장·교감·교사·교수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서서 90도로 절을 하도록 예행연습했다니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마침내 본행사 날, 학교에서는 공식 출장을 가는 까닭에 수업까지 교체를 해놓았다. 하지만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는 결근계를 내기로 했다. 감기약도 미리 사놓고 아침 일찍 결근계를 제출한 뒤 나왔다. 혹시라도 확인했을 때 증거가 없으면 문제를 삼는, 무시무시한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결근이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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