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3월 초 청와대를 방문한 통일연구소 관계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통일꾼대회와 ‘남북대화 촉구 1000만명 서명운동’을 지지하는 휘호 ‘대화로 통일, 평화로 통일’을 써주고 있다. 80년 7월 ‘통일꾼 연수’에 참가했던 필자는 광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하는 강사의 발언에 항의해 수정하도록 했다.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28
1980년 7월 통일연구소(현 민족통일중앙협의회)가 주최한 ‘통일꾼 연수’에 참가하게 됐다. 이번에도 참석 대상자를 지명한 공문이 학교로 왔다. 대학교수, 교사, 직장인, 이발사와 자장면집 주인을 비롯한 자영업자 등 다양한 직종과 계층의 참가자 500여명이 전국에서 모였다. 전남에서는 나를 포함해 12명이 참가했다. 연구소장은 이영일 전 국회의원이 맡고 있었고, 서울 장충동의 한국반공연맹(현 한국자유총연맹)에 있던 통일연수소(현 통일교육원)에서 2박3일간 진행됐다.
사실 잠시 망설였지만, 제목이 ‘통일꾼 연수’여서 내용도 궁금하고 호기심도 있어 거부하지 않고 참석했다. 그런데 강사는 육사 교수 등 다양했지만 내용은 반공연수라 하는 것이 적절했다.
연수 첫날, 개회식을 한 다음 오후에 진행된 첫 강의는 육사 교수가 진행했다. 그런데 그는 ‘남한과 북한의 정신문화’를 주제로 한 강의를 하는 도중 “얼마 전에 저 남쪽에서 폭도들에 의해 일어났던 사건과 같은 집단행동이 우리 사회에 또 일어나서는 안 되겠습니다”라는 말을 거듭 강조했다. 불과 두달 전에 겪은 5·18의 충격과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아직도 그 실상이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남쪽의 폭도들에 의한 사건과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니?
더이상 그냥 듣고 있을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어느 정도 한 것 같기에 손을 들었다. 강당에는 전국에서 모인 연수자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고, 나는 강당 앞쪽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었다. “질문할 것 있으면 하시라”기에 일어서서 “저는 교수님이 방금 말씀하셨던 남쪽 광주에서 온 사람이다”라고 소개를 하고는 내 의견을 이어갔다. “폭도들이 일으켰다는 그것은 아마 광주 5·18을 이야기하시는 것 같은데 교수님께서는 그 당시에 광주 현장에 계셨습니까? 만일 광주에 계셨다면 폭도 운운하는 내용의 강의를 하실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주에 안 계셨다면 어디 가서든지 이런 식으로 근거 없이 강의하지 마십시오. 남쪽 폭도들이 벌였다는 광주의 참상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보고 온 사람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너무 유감스럽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다른 곳에 가서 근거 없는 내용의 강의는 절대 하지 마시기를 광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또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단숨에 할 말을 쏟아낸 나는 그대로 중앙통로를 걸어 나와 버렸다. 그러나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4년 동안 교복을 비롯해 모든 의식주까지 혜택을 받고 졸업했으면 국민을 위해 또 국가를 위해 참으로 여법하게 보답해야 할 군인들이 오히려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유지를 위한 야욕을 발동해 특정 지역 시민들을 일방적으로 처참하게 짓밟아 주검의 도시를 만들어 놓았는데 폭도들이 한 짓이라고 왜곡된 강의를 할 수 있습니까?” 강의는 중단되고, 싸늘한 기운이 도는 가운데 긴 통로를 걸어 나오는 내 구두 소리가 강당 안을 더 차갑게 울리는 듯했다.
시간을 지체하고 양보하다가는 말할 기회를 놓칠 것 같기에 손을 들어 얘기를 하긴 했지만, 너무 기가 막혀서 복도로 나온 뒤 혼자 우두커니 창밖을 보고 서 있었다. 강의가 끝나자 광주교대 교수, 전남여고 김옥희 선생님 등이 다가오더니 “선생님, 큰일 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라며 격려를 해줬다.
그 육사 교수는 인상이 좋은 편이었다. 좋은 인상을 지닌 사람이 그렇게 얘기하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대로 믿지 않겠는가? ‘내가 오기를 잘했구나!’ 혼자 생각했다. 또 강의 내용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는 참가자들의 평가를 들으며 ‘아! 한사람의 힘이 매우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사실 그때 강당 안에는 보안사며 여러 기관에서 온 직원들도 함께 앉아 있었는데 현직 교사가 겁없이 ‘금기’를 깨뜨린 것이었다. 사실 나 자신 말하는 그 순간 모든 것을 각오했다. 만일 누가 만나자 하건 어떤 겁을 주건 부딪쳐보자 하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연수 이후 누구도 조사를 하거나 힘들게 하지 않았고, 학교로도 아무런 통보가 없었다. 저지른 죄를 감출 길 없으니 건들지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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