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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찾아서] 살벌한 시대권력에 맞서 어깨 내민 동료들 / 정해숙

등록 2011-06-28 19:46

1980년 5·18 당시 전남도청 앞 금남로변에 있던 광주관광호텔 일대는 계엄군과 시위대가 충돌하며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된 현장이다. 82년 3월 광주시장 초청 여교사 간담회에서 ‘2년 전 일을 잊자’고 말한 김양배 시장과 필자가 논박을 펼친 장소가 바로 지금은 없어진 이 호텔의 연회장이었다.
1980년 5·18 당시 전남도청 앞 금남로변에 있던 광주관광호텔 일대는 계엄군과 시위대가 충돌하며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된 현장이다. 82년 3월 광주시장 초청 여교사 간담회에서 ‘2년 전 일을 잊자’고 말한 김양배 시장과 필자가 논박을 펼친 장소가 바로 지금은 없어진 이 호텔의 연회장이었다.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32
1982년 3월29일 여교사 간담회장에서 ‘광주시민들이 전국에서 가장 질서 없는 시민들이고, 2년 전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자’는 광주시장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광주를 왜곡하고 비하하는 말을 듣고도 그저 밥 한그릇 얻어먹고 간다는 것은 여교사들의 자존심이, 그리고 교육이 짓밟힌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양배 시장이 마무리 인사를 마쳐갈 즈음 나는 가까이 서 있던 시청 직원에게 마이크를 달라고 요구했다. 시장이 말하는 중이라며 거절하던 그는 내가 다시 강하게 요구하자 마지못해 마이크를 건네줬다.

“시장님께서 말씀중이신데 끝나기 전에 제가 한말씀 올리겠습니다.” 나는 일어서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장님이 운영하시는 시청도 빚이 많고 어려움이 많을 텐데 우리를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오늘 들은 이야기는 이미 학교에서 교감 선생님을 통해 별도의 직원회의에서 전달받았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이렇게 이중삼중으로 모임을 가져야 했는지 의문이 듭니다. 이 자리에 참석해 느낀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장님께서 2년 전 일을 잊어버리자 하시는데, 그때를 잊고 싶지 않은 광주시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고 지워지지 않는 사건이기 때문에 못 잊어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광주시민이 전국에서 가장 질서 없는 시민이라 하시는데 도대체 질서가 뭡니까? 제가 질서의 한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외국의 어느 대학 캠퍼스에서 잔디밭에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이 있는데도 학생들이 한 강의실을 갈 때는 꼭 그 잔디밭을 밟고 갔습니다. 결국 잔디는 망가졌습니다. 총장님이 확인을 하시고는 ‘이곳은 잔디가 아니라 학생들에게 길을 내줘야 할 곳이다’ 하고 길을 만들어줬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질서가 아닐까요?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 질서입니까? 광주시민들이 지금 아무리 애를 써도 비틀거릴 수밖에 없는 상태인데 휴지 줍고 버스 탈 때 차례 지킬 여유가 있겠습니까? 시장님께 이 자리를 통해 간곡하게 부탁 말씀 올리겠습니다. 한번밖에 가질 수 없는 우리 시민들의 소중한 생명을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간담회장은 조용했다. “다음에는 반공연맹 회장께 건의드리겠습니다.” 나는 틈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학교 현장에는 반공연맹에서 발행한 많은 종류의 반공도서가 있습니다. 도서관 담당 교사로서 책이 도착할 때마다 살펴보면 무조건 북한은 호전적이며 못 먹고 못사는 지구촌의 가장 원수 등으로 서술돼 있습니다. 우리 남한도 장단점이 있고 북한도 장단점이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단점은 고치고 장점은 이어갈 수 있도록 합리적인 교육을 해야 하는데 부정적인 점만 교육을 시켜서야 되겠습니까. 북한 사람들도 우리 부모·형제·자매인데 한번 싸웠다 해서 한없이 원수가 되어야 합니까. 앞으로 반공연맹에서 책을 발행하실 때에는 청소년들이 왜곡되지 않고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자리에 앉자 홀 가득 여교사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반공연맹 지부장이 일어나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저런 여선생한테 배우는 학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시장이 일어나더니 “싱가포르에 가보셨습니까? 얼마나 질서있는 사회인 줄 아십니까? 질서가 어떻게 자연스러운 것입니까? 선생님하고 저하고 누가 더 많이 아는지 한번 만나서 이야기해 봅시다” 하고는 다시 앉았다.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찬물을 끼얹은 듯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1년 선배인 평소 말이 별로 없던 박선애 선생님(영어과)이 일어났다. “제가 한말씀 올리겠습니다. 시장님께서 아까 어떤 질문이라도 좋으니 하고 싶은 말 하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정해숙 선생님은 평소에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모범교사입니다. 시장님께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때와 장소를 구분해서 말할 줄 아는 선배이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찡했다. 간담회장이 머쓱해진 가운데 시장은 “선생님하고 언제 한번 만납시다” 하며 목에 힘줘 말하고는 퇴장을 했다.

“선생님, 정말 수고하셨어요.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속이 다 시원해요.” 제자들을 포함한 많은 여교사들이 내게 와서 격려를 해주었다. 7층 계단을 내려오니 황석심, 문경자 선배 등 나이 드신 선생님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집에 갈 때 우리랑 같이 가자” 하기에 “장염 때문에 병원 가서 주사 맞아야 한다”고 먼저 가시라 했는데도 병원까지 동행해줬다. 살벌한 시대를 견뎌낸 힘은 서로에 대한 걱정과 동료의식이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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