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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찾아서] 참교육 지키려는 교장선생님의 ‘양복 속 사직서’

등록 2011-06-30 20:08

필자가 1982년부터 5년간 근무한 광주농고는 1909년 개교해 오랜 역사와 함께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때 동맹휴학에 참여한 전통을 지닌 학교다. 지금은 광주자연과학고로 이름이 바뀐 광주 북구 오치동 교정의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비에서 해마다 11월3일 기념식을 올린다. 
 사진 광주농고총동문회 제공
필자가 1982년부터 5년간 근무한 광주농고는 1909년 개교해 오랜 역사와 함께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때 동맹휴학에 참여한 전통을 지닌 학교다. 지금은 광주자연과학고로 이름이 바뀐 광주 북구 오치동 교정의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비에서 해마다 11월3일 기념식을 올린다. 사진 광주농고총동문회 제공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34
1982년 3월29일 광주시장 초청 여교사 간담회 때 발언 소명을 위해 이튿날 광주시교육청에 출석했을 때, ‘병신이 되자’는 송동휴 장학관의 말에 나는 아픈 마음을 다독이며 다시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장학관님께 정말 죄송합니다. 이 사건은 사표를 쓴다고 해결되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지혜롭게 푸느냐가 문제인데 저는 저대로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장학관님도 그 자리에 참석하셨는데 지혜롭게 잘 논의해 보시지요. 그러나 함부로 병신 되는 것, 그것은 병신사회 만드는 거예요. 저도 생각해 볼게요.”

광주농고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모두 퇴근하고 이병석 교장 선생님 혼자 기다리고 계셨다. “오늘 교육청에서 있었던 일 하나도 빼지 말고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그 첫마디에 믿음이 생겼다. 어제 간담회에서 있었던 일부터 아침 출근 전에 전화받았던 내용, 그리고 교육청에서 장학관·장학사들과 주고받은 이야기까지 낱낱이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저는 정해숙 선생님을 이 학교에서 처음 만났지만, 나름의 교육철학이 없다면 그런 발언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하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때까지 그저 교육관료로만 여겼던 교장 선생님에 대해 전혀 새로운 면모를 느낀 순간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곧바로 양복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보여주셨는데 사직서였다. 당시 교장, 교감 선생님들에게는 교사와 학생들 동태를 파악해 보고하는 임무가 과외로 부과돼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동태파악을 위한 정보비 20만원씩을 교장에게 지급했다. 정보비를 안 받으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나는 날마다 사직서를 써가지고 다닙니다. 교사와 학생들 동태를 파악해 보고하라 하는데 어쩔 수 없을 때는 자리를 내놓을 각오입니다.” 기막힌 교육현실이었다. 교장 선생님의 참담한 번민이 내게 그대로 전해졌고 깊은 신뢰가 생겼다.

“며칠 뒤 학교시설 문제로 시청 과장을 만날 텐데, 그때 선생님 문제를 얘기해 보겠습니다. 그 기회를 이용해 학교 책임자로서 할 말을 전할 터이니 그리 알고 근무하십시오.” 동료교사를 신뢰하고 책임자로서 책임을 다하려는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되짚어 생각해보니 광주농고로 발령받은 직후 ‘그 학교 교장 선생님, 대교장이여’라고들 했던 소문이 떠올랐다. 교사건, 학교 책임자건, 교육관료건 저마다 깊은 고민을 안고 살아야 했던 서글픈 시대였다.

얼마 뒤부터 정보기관에서 나에 대한 감시와 조사가 시작되었다. 공립학교 선생님들과 만나면 주로 ‘진급이나 점수’ 얘기들이기 때문에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사립학교 선생님들과 친했는데, 5·18 이후 가깝게 지내며 마음을 다독이고 공부도 같이 했던 사립학교 여선생님들도 조사 대상이었다. 이경희·최화자·김국자·김희강·고병희 선생님 등이었다. 결혼한 선생님의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까지 뒷조사를 했다. 그래서 이후 여선생님들과는 일절 만나지 않았다.

어느 날 교감 선생님이 “지금 선생님에 대해 조사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만 알고 계세요”라며 넌지시 조심하라는 암시를 주었다. 근무태도가 어떤지, 근황이 어떤지, 학교로 간간이 전화가 오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한 여선생님이 응원 전화를 해주기도 했다. “선생님은 저를 모르실 텐데 간담회 때 참석했고, 선생님 말씀에 박수쳤던 교사입니다. 요즘 선생님 어려움 많으시다는데 힘든 일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저희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선생님 말씀이 옳아 박수를 쳤으니 우리도 같이 책임져야지요. 힘내세요!”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통일꾼 연수에 같이 갔던 어느 사립학교 교감 선생님도 연락을 했다. “이번에 큰일 했는데 조사가 심한 것 같다”며 내 제자인 그 학교 여선생님한테 누군가 찾아와 나에 대해 물어보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여선생님이 ‘정 선생님은 같은 여선생님들도 존경하고 좋아합니다’라고 답했다는 말을 전하고 “응원하는 사람 많으니 힘내라”고 격려해 주었다.

7월 방학할 무렵 교감 선생님이 다시 불렀다. “그 사건 마무리됐네요. 없었던 일로 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왜 그럴까요?” “제가 좀 알아봤는데, 무슨 여선생이 스캔들도 없고, 비리도 없고, 아무것도 문제삼을 거리가 없다고 했답니다. 안심하고 다 잊어버리십시오.” 흠잡을 것을 찾지 못하자, 문제삼았다가는 오히려 안 되겠다 판단했던 모양이다. 3월 말부터 시작된 사건은 7월에야 마무리가 되었다. 교직사회에 몸담고 있는 동료들의 시대적 고뇌가 아픔으로 다가온 사건이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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