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의 충격에 시달리던 필자(오른쪽)는 양초공예를 배워 82년 12월 무고하게 희생된 시민들의 넋을 위로하는 ‘촛불굿’ 전시회를 열었다. 광주 금남로 가톨릭센터 2층에 마련된 전시장에는 문병란 시인(왼쪽)을 비롯해 많은 지인과 관람객들이 찾아와 성황을 이뤘다.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36
1982년 10월, 서울 한국일보사 부설 문화센터에서 양초공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둘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5·18 당시 죽어간 수많은 생명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죽음을 보면서 촛불이 떠올랐다. ‘투쟁하다 죽어간 생명들이야말로 자기를 태워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촛불과 같구나’ 하는 생각으로 연결되었다.
80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 열사가 죽어가는 과정을 우리는 지켜봐야 했다. 5·18 직전까지 반독재 투쟁을 주도했던 박관현은 82년 4월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체포됐다. 공기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독방에 갇힌 박관현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벌이며 비슬비슬 말라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목사와 신부 등 종교인들의 노력으로 겨우 면회가 허용되었고, 이어 전남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그는 이미 말도 제대로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박관현은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며 입놀림을 계속했다. 신부님 한 분이 어렴풋이 들은 것은 “신영일도 죽어가고 있다. 살려주라”는 내용이었다. 신영일 역시 박관현과 같이 반독재 투쟁을 주도하다 체포돼 밀폐된 독방에 갇혀 고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박관현은 “신영일을 살려주라”는 말을 남긴 채 옥중 단식투쟁 50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박관현이 병원으로 옮겨지자 사람들은 매일 전남대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실을 삼엄하게 통제했기 때문에 만나거나 말을 건넬 수 없었지만 밖에서라도 모습을 볼까 싶어 퇴근 뒤면 병원으로 모였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고문당해 죽어간 사람들 이야기는 수없이 들었지만 현장에서 생생하게 목격한 것은 5·18 때가 처음이었다. 그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을 뭔가로 표현하고 싶었다. 나는 촛불을 떠올렸다. ‘자기를 태워서 어둠을 밝혀주는 초!’ 그래서 양초공예를 배우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광주에는 가르치는 곳이 없었다.
이병석 교장 선생님께 “당분간 매주 수요일 하루 연가를 내고 뭘 좀 배우러 서울을 다녀야겠습니다” 말씀드렸다. 시장과 간담회 사건을 겪으면서 서로 신뢰가 깊어진 덕분에 선뜻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실업학교여서 인문과목 수업이 많지 않은데다 도서관 담당이어서 수요일 수업을 다른 요일로 바꾸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른 아침 첫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강습을 받은 뒤 늦은 시간 내려오는 ‘당일치기’를 하며 날마다 퇴근만 하면 집에서 습작을 했지만 피곤한 줄 몰랐다.
그렇게 1년 남짓 만인 83년 12월10일, 금남로 가톨릭센터 1층 전시장에서 촛불 전시회를 열었다. 5·18 영령을 위로하고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내용이었다. 농고에 같이 근무했던 김은수 선생님에게 ‘촛불’과 ‘무등산’ 시를 부탁했다. 전시회장 가운데 추모단을 설치하고 ‘무등산’ 시로 만든 병풍을 뒤에 펼쳤다. ‘선구자’ 악보를 새긴 대형 초는 추모단 가운데에, 해바라기꽃을 넣어 만든 조금 작은 초는 양옆에 놓고 불을 밝혔다. 연꽃과 해바라기꽃으로 추모단과 촛불 주위를 꾸몄다. 원예과 국정애 선생님이 꽃꽂이를 맡아 주었는데 전시회장 분위기를 한껏 살려주었다. 양쪽으로는 십자가 장식을 곁들인 달걀초와 불교의 만자를 조각한 초, 전시장 중앙에 ‘무명교사 예찬’을 새긴 대형초 등을 배치해 세계평화와 종교, 교육을 상징화했다.
헨리 밴 다이크의 ‘무명교사 예찬’ 일부를 옮겨 본다. ‘나는 무명교사를 예찬하는 노래를 부르노라/ 위대한 장군은 전투에 승리를 거두나 전쟁에 이기는 것은 무명의 병사이다/ 유명한 교육자는 새로운 교육학의 체계를 세우나, 젊은이를 건져서 이끄는 자는 무명의 교사로다/ 그는 청빈 속에 살고 고난 속에 안주하도다. (중략) 국가를 두루 살피되, 무명의 교사보다 예찬을 받아 마땅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민주사회의 귀족적 반열에 오를 자 그밖에 누구일 것인고/ 자신의 임금이요, 인류의 머슴인저’
전시회는 성황을 이뤘다. 이병석 교장 선생님은 개막 첫날 늦은 시간에 오셔서 전시장을 둘러보고 무척 좋아하시더니 문 닫을 무렵 다른 교장 선생님 두 분과 다시 와주셨다. 마침 예비고사가 끝난 뒤라 사립학교에서는 고3 학생들이 스쿨버스로 단체관람을 오기도 했다. 미국에 계신다는 수녀님 두 분이 우연히 들렀다가 ‘참 좋다’며 미국에서도 전시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다음날 또 와서 얘기를 했지만 경비 문제도 있고 해서 겸손하게 사양했다. 하루는 정보기관 사람들이 전시장을 찾아와서는 “왜 ‘무등산’ 시를 전시했느냐”고 물었다. “무등산 시가 어떻습니까? 광주 사람 중 무등산 시를 한두명 씁니까? 그냥 조용히 보고 가세요.” 그들은 “선구자도 있고 뭐…” 하면서 우물쭈물하더니 그 뒤로는 다시 연락이 없었다. 아마도 ‘색깔 시비’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대의 어둠을 밝히며 스러진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5·18 현장인 가톨릭센터 전시장에서 열었던 촛불 전시회는 조금이나마 내 아픈 마음을 달래주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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