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교육 운동가로 누구보다 ‘광주항쟁’과 해직교사의 아픔을 껴안아줬던 성내운 교수는 300여편의 우리 시를 암송하는 음유시인으로도 유명했다. 1985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모임에서 백낙청 교수(왼쪽부터), 안종관 희곡작가, 성 교수, 송건호 민언협 의장 등이 함께한 모습.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44
지난 삶을 되돌아볼수록 어려울 때 곁에서 힘을 북돋워준 어른들의 존재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성내운 선생님은 우리 시대 교육 지도자로서 자랑스런 선배였고 ‘광주’의 고통을 민족의 총체적인 아픔으로 껴안아주신 큰어른이었다.
성내운 선생님은 1981년 광주와이엠시에이(YMCA) 백제실에서 열린 5·18 광주민주화운동 1주기 행사에서 처음 만났다. 그날 낮에 전경들을 내세운 전두환정권의 방해를 뚫고 5·18 묘역(옛 망월동묘역)을 참배하고 오신 선생님은 추모사에서 “나는 고향이 충청도이지만 이제 본적을 광주로 옮기겠다”고 말씀하셨다. ‘광주시민과 전라도민들을 격려해 주시는 참 고마운 말씀이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켠으로는 ‘그렇게까지 하시랴’ 했다.
선생님은 그때 연세대 해직교수 상태였다. 박정희정권은 ‘긴급조치 9호’로 교수재임용제를 도입해 76년에만 양심적인 교수 400여명을 교단에서 추방했다. 선생님은 78년 전남대 교수 10여명의 이름으로 발표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송기숙 교수님과 함께 구속당하며 해직됐다. ‘10·26’ 이후 복직됐던 선생님은 80년 5월 ‘서울의 봄’ 때 또다시 쫓겨났다.
다시 뵌 것은 84년 부산대에서 열린 전국도서관대회 출장 때였다. 교정 곳곳에 ‘학생의 날 부활 기념 강연 성내운 교수’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53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됐다가 73년 반유신독재 민주화 투쟁이 계속되자 폐지됐던 학생의 날(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 그해 9월 국가기념일로 다시 지정된 것을 기념한 행사였다. 나는 세미나 참석 대신 선생님 강연장을 찾았다. 제법 큰 강당에 교수와 학생들이 가득 차 일부는 서 있을 정도로 성황이었다.
선생님은 이미 정평이 난 ‘시 낭송’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암송하는 시가 무려 300편이 넘어 ‘시인은 시를 쓰고, 선생님은 시를 완성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때도 윤동주 시인의 시부터 해방을 거쳐 5·18까지 근대사의 고비고비를 상징하는 시들을 읊어주셨다. “내 고향이 충청도입니다. 5·18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치러낸 광주·전남도민들에게 너무나 고맙고 미안합니다. 그쪽 지역이 국가폭력에 의해 대표로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광주의 5·18을 계기로 나는 본적을 광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순간 강당은 정적에 휩싸였고, 부산에서 다시 들은 그 말씀은 사무치도록 감동적이었다.
선생님과 직접 자리를 같이한 것은 86년 ‘호남지역 교육민주화선언 실천대회 사건’ 때였다. 바로 엊그제 유명을 달리한 유상덕 당시 민주교육실천협의회 사무국장과 함께 구속된 윤영규·김경옥·주진평 세 분 선생님의 첫 재판을 격려하러 광주까지 오신 것이었다. 재판 뒤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감사 인사를 드렸더니 또 한번 잊지 못할 말씀을 하셨다. “오늘 선생님들의 진술은 역사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교육민주화를 위해 활동했다는 주장을 아주 논리적으로 설파했습니다. 저는 오늘 재판정에 가기 위해 서울서 광주로 내려온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정신적 수도로 올라왔습니다. 행정적인 수도는 서울이지만 정신적인 수도는 광주 아닙니까?” 그로부터 3년 뒤인 89년, 선생님은 광주대 총장으로 취임하시며 약속대로 삶의 터전을 광주로 옮겼다.
선생님은 89년 전교조 출범 이래 한번도 초청을 거절한 적이 없을 정도로 무한한 애정을 쏟아주셨다. “당연히 가야지. 내가 아무리 바빠도 전교조 선생님들의 고생에 비할 수 있겠느냐. 빨리 합법화되어야 할 텐데…” 하시며 해직교사 1500여명과 전교조의 어려움을 안타까워하셨다.
89년 11월17일 성신여대 운정관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주최한 ‘전교조 해직교사 후원을 위한 민족문학의 밤’이 열렸다. 그때도 서울교육청 장학사들이 행사장 주변에 출동해 감시했지만 행사장은 선생님과 학생들로 가득 찼다.
당시 안동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문익환 목사님의 장남 문호근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음악분과위원장이 총연출을 맡았다. 선생님은 김구 선생의 시를, 영화배우 문성근씨가 부친 문 목사님의 ‘꿈을 비는 마음’을 낭송했다. 나는 해직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 80년 5·18 이후부터 수업시간에 가끔 눈물이 핑 돌 때가 있었단다. … 양심과 신념만이 우리 교사들의 귀중한 재산인데, 특정 정권에 기여하는 교육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에 기여하는 교육,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위해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바치련다. 참교육 실현의 날, 해맑은 웃음으로 우리 다시 만나자….”
그 자리가 선생님의 마지막 공식 행사 참석이었다. 그 뒤 혈액암으로 투병하실 때 가족들이 기독교에 귀의할 것을 권하자 “그동안 뜻을 같이했던 동지들 중에는 기독교인도, 천주교인도, 불교인도, 원불교인도 있고 종교가 없는 분도 있는데 내가 어느 쪽으로 귀의를 하겠느냐. 우리 모두 함께인데…” 하며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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