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월22일 경기도 수원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강당에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창립대회가 열려 단병호 초대위원장이 선출됐다. 같은 날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의 탄압에 맞서 전교조 등 가입단체들은 연대 투쟁에 나섰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62
1989년 5월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초기, 당국은 전교조의 모든 행사와 모임을 원천봉쇄하기에 급급했다. 사사건건 탄압하고 가로막으니 전교조 집행부는 대회나 행사 때마다 원천봉쇄를 뚫을 방안을 찾아야 했다. 대회 장소를 미리 답사하는 것은 필수였고 제2, 제3의 장소를 물색해 두었다. 여러 장소를 지칭하는 암호를 각각 정하고, 한 장소가 막히면 긴밀하게 연락하며 다른 장소로 옮겨 대회를 성사시키곤 했다.
89년 하반기, 조직이 복원된 뒤 구성된 3차 대의원대회가 12월20일 인천 제일감리교회에서 열렸다. 물론 비밀리에 열렸고, 작전 이름은 ‘월동작전’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대회 장소를 대구로 공표하고, 경찰에 노출되지 않을 전화와 안가를 인천에 확보했다. 암호는 ‘연탄·무·배추’였다. 대회 장소에 모일 대의원 인원은 ‘배추 몇 포기, 무 몇 단, 연탄 몇 장’ 등으로 확인했다. 대회에서는 법외노조인 전교조의 합법화 쟁취 투쟁과 함께 교직원의 권익 신장, 학생 권리 보호, 국민의 교육적 이해와 요구 실현 투쟁을 적극 벌일 것을 천명하고, 실천을 결의했다. 오후 2시 시작해 5시30분 끝날 때까지 교육청과 경찰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인천시경의 전교조 담당 경찰관 7명이 직위해제되었다.
같은 시간 공식 장소로 발표해놓은 경북대에서는 실제로 대회가 열리는 것처럼 대학생들의 전교조 대의원대회 사수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경찰의 관심을 따돌리려는 작전이었다. 대구와 경북지부 조합원들은 상황을 모른 채 경북대로 모였고, 경찰은 대의원대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을 쏘는 등 안간힘을 썼다.
당시 노태우 정권의 교원정책은 현직 교원과 전교조를 철저히 분리시키는 전략이었다. 문교부는 전교조 결성 바로 다음날인 5월29일, 진보적인 예비교사의 교단 진입 장벽을 높이려는 의도를 담은 ‘교원 선발 양성 및 임용에 관한 종합대책안’을 발표했다. ‘국립교대·사대생의 임용과정 특혜 폐지와 교원임용고시 도입’을 담은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은 90년 2월 임시국회에 제출됐고, 그해 말 거대 보수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의 강행처리로 제도화했다.
교원임용고시제 실시 발표가 나오자 교대와 사대생들의 항의시위와 교수들의 성명 발표 등 파문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임용고시제는 대학을 입시학원화해 국가가 교육을 독점하려는 음모’라며 당장 철폐할 것과 정원식 문교부 장관의 퇴진을 요구했지만 돌이키지는 못했다.
민자당은 90년 1월22일 노태우·김영삼·김종필에 의한 이른바 ‘3당 합당’으로 출현했다. 이후 집권당의 일방적인 독주가 계속되었고, 정국은 다시 5공화국 독재정권 시절로 퇴행했다.
바로 그 1월22일에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위원장 단병호)가 결성되었다.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 전노협이 결성되자 정부는 역시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지도부 구속과 수배, 소속 노조의 탈퇴 강요 등 갖은 방법으로 탄압했다. 그 때문에 초기 상근자 49명 중 48명이 구속되고 1명은 수배 상태여서 사무실 운영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각 부문 단체들이 한명씩 상근자를 파견해 사무실을 운영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전교조에서는 이상호 선생님을 파견했다. 곧이어 전노협 운영기금 마련을 위한 서화전시회를 열었다. 나는 한국화 원로인 아산 조방원 선생님의 글씨를 받아달라는 운영진의 부탁을 받았다. 생전 만난 적도 없던 아산 선생님은 뜻밖에도 흔쾌히 수락을 하고 사흘 만에 작품을 보내주셨다.
이어 5월30일에는 전교조를 비롯한 업종별 연맹의 상설적인 연대체인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가 결성됐다. 전노협과 업종회의는 93년 6월1일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를 구성해 ‘한국노총’과 차별되는 사회개혁 투쟁을 전개한다. 전노대는 이후 민주노총으로 발전했다.
4월21일 민주화운동 진영은 ‘3당 합당은 3당 야합’이라고 비판하며 공동대응을 위한 연합체를 건설했다. 89년 이미 출범한 전민련을 비롯해 전노협·전농준비위·전대협·민교협·민가협·민예총 등 20여개 단체가 ‘민자당 장기집권음모 분쇄와 민중기본권쟁취 국민연합’(국민연합)을 결성했다. 4월26일에는 명지대생 강경대군 사망사건이 발생했다. 51개 민주사회단체와 정당들은 ‘고 강경대군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대책회의)를 결성하고 공안통치 종식 투쟁을 벌였다. 이후 분신·투신·진압 중 압사 등으로 11명의 학생과 시민이 죽어가면서 정국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전교조는 대책회의에 이수호 집행위원장, 이동진 대변인, 곽동찬 선전국장, 박인구 투쟁기획국장 등을 파견해 ‘폭력살인정권 규탄’ 투쟁을 같이 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