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봄 이른바 ‘분신 정국’ 속에서 맞은 ‘5·18’ 추모행사 중 분신한 전남 보성고 3학년생 김철수군의 죽음은 전국적인 고교생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필자는 그해 6월9일 빗속에 열린 김군의 장례위원장을 맡아 보성고에서 망월동까지 장례 행렬을 이끌었다.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64
1991년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이 탄생한 이후 계속된 공안정국은 결국 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군 타살 사건을 불러왔다. 학원자주화 투쟁에 참여했던 새내기 강군이 백골단 소속 사복경찰의 쇠파이프에 구타당해 사망한 것이다. 바로 이튿날 민주시민단체들은 ‘고 강경대군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대책회의)를 결성했다. 강군의 유해가 광주 망월동 묘역에 묻히기까지 25일간의 정국은 긴박했다. 4월29일 전남대 박승희 학생의 분신을 시작으로 5월8일까지 분신, 투신, 진압과정의 압사 등으로 11명이 희생됐다.
80년 ‘5·18’ 이후 열사들의 주검은 대부분 광주로 왔다. 91년 분신 정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주 이외의 도시에서는 열사들의 주검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분신으로 화상을 입은 투사 환자들도 전남대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전국연합이 전남대병원에 차린 임시 사무실에서 광주·전남 동지들과 분신 투사의 가족들이 함께 환자들을 돌봤다. 김밥 등 먹을거리를 준비해 가족들에게 주고 당번을 정해 환자를 보살폈다. 그러다 끝내 투사가 숨지면 보도자료를 통해 언론과 사회에 알리고, 대형 초상화 제작 등 장례 준비를 도맡아 했다. 전교조 선생님들도 그 중심에서 활약했다. 오후 5시 이전까지는 지부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퇴근하면 전남대병원으로 이동해 일을 봤다. 나는 지부장을 맡고 있던 터라 일이 더욱 많았고, 귀가 시간은 날마다 새벽 1, 2시가 다반사였다.
분신 사망 투사들의 장례는 사회단체 책임자들이 병원비 등에 대한 보증을 선 뒤에야 치를 수 있었다. 가족들과 단체 활동가들도 고생이 많았지만 전남대병원에서도 배려를 많이 해주었다. 치료비를 제대로 치르지 못해도 단체 대표 몇 명이 가서 서약서를 쓰면 출상을 하도록 해주곤 했다. 그때 동지들의 우애는 굉장히 끈끈했다. 수많은 젊은 동지들의 억울한 주검을 마주하면서 서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어려운 정국을 헤쳐 나갔다.
그해 5월18일, 망월동 묘역에서 ‘광주민중항쟁 계승과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범국민대회’를 치르고 있는데 긴급한 연락이 왔다. 국회의원·신부님·사회단체 대표 등 수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가운데 유독 ‘전교조 광주지부 선생님’인 나를 찾았다. 전남 보성고 3학년 김철수 학생이 분신해 전남대병원으로 막 실려왔다는 것이었다.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급히 응급실로 가보니 김군의 몸은 심하게 그을려 있었다. 모두들 살리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김군은 보름 만인 6월2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직 소년인 김군은 왜 분신까지 해야만 했을까. 김군은 건강하고 모범적인 학생회 간부였다. 3월 새학기 때부터 ‘5·18’ 추모 행사를 학교 쪽에 건의했던 김군은 마침내 5월18일 수백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학생회 주최로 11년 만에 처음 열린 ‘5·18’ 추모식장에서 “우리는 참교육을 받고 싶다.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고 외치며 분신을 했다. 강경대 열사의 장례 행렬이 사망 23일 만에 광주 망월동으로 향하고 있던 바로 그날 그 순간이었다.
전교조 광주지부장으로서 내가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6월8일 전남대병원 앞 노제를 시작으로 ‘애국학생 고 김철수 열사 추모식 및 민주국민장’이 진행됐다. 이애주 서울대 교수가 씻김굿을 한 뒤 보성고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날씨는 맑았다. 학교에 도착해 보니 교장 선생님은 마침 전남여고와 농고에서 같이 근무했던 분이었다. “정 선생님이 오실 줄 알았다”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분의 모습을 보며 ‘교장 선생님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참 힘드셨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에서 모인 선생님들과 사회단체 회원들이 여러 교실에 나뉘어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운동장에서 재학생과 교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영결식을 해야 하는데, 밤부터 시작된 비가 새벽이 되자 아예 장대비로 쏟아졌다. 장례식 진행 여부를 놓고 논의 끝에 ‘장례위원장에게 위임한다’는 결론이 났다. 나는 많이 망설이다가 예정대로 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우중 영결식은 누구 하나 이의 없이 무사히 진행됐다. 대형 걸개그림 등 장례용품들은 트럭에 싣고, 조문객들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광주 시내로 들어갈 무렵부터 비가 서서히 그치기 시작했다. 장례 행렬은 남구 백운동 쪽에서 금남로를 거쳐 전남도청 앞까지 행진했다. 도청 앞 분수대를 무대로 노제를 지냈다. 장례위원장 차례가 돼 무대로 올라가 추모사를 하는데 분수대 왼편의 3층짜리 와이엠시에이 건물 뒤편으로 순간 해가 비치는가 싶더니 금방 또 구름에 가렸다. ‘정말 너무나 기가 막힌 장례식이구나!’ 혼자 속마음이었다. 망월동 묘역에 도착한 것은 어둑해진 때였다. 강신석 목사님의 기도로 19살 짧은 생을 마감한 김철수군을 우리는 불을 밝히고 묻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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