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3월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지역 교육포럼 참가자들이 사흘간의 공식 일정을 마친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필자(앞줄 여성 가운데 맨 왼쪽 한복 차림)를 비롯한 전교조 대표단은 일교조 산하 홋카이도교조를 탐방하며 연대를 다졌다.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69
1992년 3월4일부터 사흘간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지역 교육포럼’ 공식 일정이 끝난 뒤 참가단체별로 일교조의 지역 교조를 탐방했다. 전교조 대표단은 말레이시아 대표와 함께 홋카이도(북해도)교조 사무실을 방문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환영차 나온 홋카이도교조 대표들이 방한복을 전해줬다. 온통 눈 천지인 풍경을 보고서야 교조 쪽에서 방한복을 미리 준비해 놓겠다며 여러 차례 연락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에 극구 사양한 것이 오히려 미안하게 생각될 정도로 일본 교육 동지들의 배려가 고마웠다.
홋카이도교조에서는 우리 일행을 위원장실로 안내하더니 도지사와 교육장에게 직접 전화로 우리의 도착 소식을 알렸다. 교조 사무실은 조합 소유의 5층 건물에 있었다. 홋카이도는 지역이 넓어 대의원대회 같은 전체회의에 참석하는 먼 지역의 노조원들이 사무실을 유스호스텔처럼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평상시에는 다른 단체 회의나 결혼식장 등으로 대여해주고 수입은 운영비로 쓴다는 것이었다. 사무실은 고사하고 법적으로 인정조차 못 받고 있던 전교조의 처지가 떠오르며 참 부러웠다.
이어 홋카이도 도지사와 교육장을 만났는데, 가는 곳마다 사무실 책상 위에 자그마한 태극기와 말레이시아 국기를 일장기와 나란히 배치해놓고 우리를 맞이했다. 일본인들의 치밀하고도 안정감있는 준비 자세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탄압 상황에서 항상 긴장해야 했던 우리와는 사뭇 다른 그들의 여유가 또 한번 부러웠다.
하루 일정이 끝난 뒤 저녁식사 자리에서 한국·일본·말레이시아의 교육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고향이 어디냐 묻기에 광주라고 답하며 ‘5·18’과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교조 임원들은 교육자여서인지 한국의 상황을 대체로 알고 있어 내 이야기에 “아! 광주” 하면서 반응을 보였다. 일본에서는 홋카이도 지역이 한국의 광주와 비슷한 정서라고 설명했다. 메이지유신 때 많은 지식인들이 홋카이도로 유배를 당한 까닭에 정부와 맞서 싸우는 전통이 있다며 공감했다. 또 교조 임원들 거의 대부분이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내 나라 형제·자매끼리 서로 가지도 만나지도 못하는데 일본인들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러운 한편으로 분단 현실이 안타까웠다. 동시에 전교조가 하려는 통일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절실하게 깨달았다.
일교조의 지역 교조들은 아태지역 교원단체 대표들의 방문에 맞춰 모두 대의원대회를 소집해 두었다. 방문 사흘째 홋카이도교조의 대의원 400여명도 제법 넓은 강당에 모였다. 우리는 대구에서 유학온 한국 학생의 통역으로 전교조 탄생 배경과 탄압 상황, 전교조가 지향하는 교육 이념 등을 설명했다. 한편으론 외국을 방문해 국내의 탄압 상황을 설명한다는 것이 한국의 인권 수준을 드러내는 듯해서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다. 설명이 끝나자 질문이 이어졌다. 어떤 대의원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나는 해방 전 초등학교 저학년 때 보았던, 딸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갈까봐 몹시 걱정하던 한국 어머니들의 모습을 설명해 주었다. “여자애들은 15살이 넘으면 일본으로 끌려가게 되니까 장애인 신랑감이라도 구해 서둘러 결혼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도 전해 주었다. 일제의 한국 수탈 상황도 덧붙였다. 대의원들과의 대화는 꽤 긴 시간 진행되었는데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았다.
대회가 끝난 뒤 이어진 환영 만찬에서 한 여성 도의원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보이기에 “얼마 전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집이 마련돼 함께 기거하고 계시다”고 알려주었다. 그 의원은 “우리는 우리대로 노력한다고는 하지만 잘 안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꾸준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을 해주셔야 합니다. 일본 정부가 스스로 해결할 리가 없으니 한국 국민들이 일본 쪽에 계속 촉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며 우리의 적극적인 노력을 주문했다.
홋카이도 방문 마지막날 관광을 했다. 삿포로시를 비롯한 명소를 안내해 주었다. 3월인데도 차 다니는 길 외에는 눈이 높게 쌓여 있었는데 6월이 되어야 완전히 녹는다고 했다. 수돗물은 어디서나 마음 놓고 마실 수 있는 청정한 곳이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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