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2월 전교조 제5대 위원장으로 당성된 필자는 첫 여성 위원장으로서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 행사에 참석했다. 이날 오후 서울 명동 YWCA 회관에서 ‘3·8 한국여성대회’를 마친 여성단체 회원들이 탑골공원까지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74
1992년 대통령선거 패배를 딛고 전교조는 93년 초부터 해직교사 원상복직 투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2월1일부터 4대 대표단인 이영희 위원장, 최교진 수석부위원장을 비롯해 시·도지부장 등 간부들이 서울 당산동 본부 사무실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전교조는 새로 출범하는 김영삼 정부에 2월 안으로 해직교사 문제 해결, 선별복직 논의 중단, 전교조와 대화 등을 요구했다. 2월13일까지 2주간의 단식농성 기간 동안 각계의 지지가 이어졌다. 민변, 민교협, 민가협, 참교육학부모회, 불교인권위원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인권위원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8개 단체는 ‘양심수 석방과 해직교사 원상회복’을 촉구하며 기도회와 법회 등 다양한 활동을 벌었다. 이 단체들의 후원으로 세종대에서 진행된 ‘얼음장 밑으로 봄이 와요’ 시민의 밤 행사에는 가수 김원중·이선희와 도종환 시인 등이 출연했고, 해직교사 복직을 바라는 많은 시민들이 참여했다. 한국노총도 해직교사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월25일 ‘문민정부’를 표방하며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첫 교육부 장관으로 오병문 전 전남대 총장을 임명했다. 오 장관은 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수습위원과 전남대 직선총장 등을 지낸 해직교수 출신이었다. 전교조는 이런 이력에 비춰 오 장관이 교육 민주화에 대해 이해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를 했다. 그래서 오 장관에게 전교조에 대한 문민정부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 교육문제 해결에 동반자적 자세로 협력해 나갈 것을 주문했다.
전교조는 28일 건국대에서 대의원대회를 열어 나를 위원장으로 하는 5대 집행부를 출범시켰다. 이부영·고진형·이수호 부위원장, 이영주 사무처장, 이수일 정책위원장 등이 인준받았다. 대의원대회에서 밝힌 취임사에서 나는 개혁과 변화를 바탕으로 ‘신한국’을 만들겠다고 한 새정부는 올바른 교육개혁을 이루기 위해 전교조 합법화와 해직교사 원상복직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내야 할 것이라는 기대와 요구를 밝혔다, 아울러 우리도 한 차원 높은 전진을 위해 철저한 자기진단과 성찰을 바탕으로 실천해 나가자고 조합원들에게 당부했다.
위원장으로서 나의 첫 공식 행사는 ‘3·8 여성대회’ 참석이었다. 서울 명동 YWCA 강당에서 열린 여성대회에는 여성 동지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여성으로서 첫 전교조 위원장을 맡고 있어서인지 내게 선언문 낭독을 요청했다. 선언문 내용은 지금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꽤 길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날 권영길 업종회의 대표(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와 전국건설일용노동조합협의회(현 전국건설노동조합)의 배석범 동지 등도 참석했는데, 그때까지 두 분을 모르고 있었기에 가볍게 인사만 나눴다. 그런데 행사가 끝난 뒤 유상덕 수석부위원장이 “위원장님, 권영길 업종회의 대표가 어디서 저런 여선생님을 구해 왔냐고 하시네요”라고 전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유 선생도 권 대표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 얘기를 하던 상황이 재미있었던지 함께 한참 웃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특히 전교조 여선생은 나이도 젊고, 키도 작고, 못생기고, 버릇없는 교사들로 악선전을 했던 터라 50대 초반의 내가 앞에 나서자 약간 혼란스러워들 했다. 권 대표와는 이후 업종회의에서 정식 인사를 나눴고, 국제행사에도 같이 참석했다. 권 대표는 전교조에 깊은 애정과 헌신을 보여준 대표적인 지지자 중 한 분으로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93년 들어 전교조와 정부 사이에 해직교사 복직 논의가 시작됐고, 같은 광주 출신 인사가 전교조 위원장과 교육부 장관을 맡고 있어서 당산동 전교조 사무실에 기자 출입이 잦았다. 3월24일쯤으로 기억된다. 김영삼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각 대학 수석 졸업생과 오찬모임이 있었다고, 그 자리에 함께했던 기자가 전교조 사무실에 들러서 전해줬다. 수석 졸업생들로부터 정부에 건의하고 싶은 사항을 자유롭게 듣고자 마련된 자리였는데, 한 여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서는 이런 이야기를 했단다. “김영삼 대통령님께 건의하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아주 존경했던 선생님들이 전교조 가입을 이유로 해직이 되셨습니다. 우리 선생님들을 언제쯤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실 것인지 대통령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김 대통령이 “교사가 무슨 노동자입니까…”라고 답변을 시작하더라고 했다. 그 뜻은 ‘해직교사 복직 문제’는 아직 대통령 머릿속에는 없다는 사실의 다른 표현 아니겠는가? 대통령 선거 때 ‘전교조 합법화’ 공약을 일주일 만에 빼버리더니 역시 ‘김영삼 대통령은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의식을 갖고 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확인한 기회가 되었다.
나는 전교조 간부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고 문민정부의 해직교사 복직과 전교조 합법화 방침이 어떠할지를 두고 고민을 나누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