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0월15일 오후 2시 필자가 전교조 5대 위원장으로서 기자회견을 열어 “교육 현장에서 참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최대 다수가 복직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써 전교조 결성 4년 남짓 동안 해직된 교사 1500여명이 교단으로 돌아가는 길이 열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81
교육부가 복직신청서 제출 기한을 1993년 10월28일로 연장한 뒤에도 전교조 지도부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회의에 회의를 거듭한 끝에 교육부가 제시한 ‘복직 절차’를 받아들이기로 방향을 정했다. 두번째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의 관심도 지대해졌다. 10월15일 위원장 특별담화문 발표를 예고하면서 기자들은 한층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만큼 조정묵 대변인을 비롯한 대변일실이 무척 분주했다.
기자회견을 하루 앞둔 10월14일 저녁까지 서울 당산동 전교조 본부 사무실에서 간부회의를 계속했다. 잠깐 쉬는 시간에 보니 <조선일보> 여성 기자가 와 있었다. 흔히 하는 말로 ‘냄새를 맡았구나’ 싶어 우리는 회의를 중단했다. 우리는 기자에게 피곤해서 집으로 돌아갈 거라 설명하고는 사무실에서 나왔다. 뿔뿔이 흩어졌던 간부들은 당시 내가 머무르던 합정동 숙소에서 다시 모였다. 밤 12시, 우리는 회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막 시작할 무렵 숙소 전화 벨이 울렸다. 벨이 계속 울리자 몇몇 간부가 받으라고 재촉했다. 누군가 수화기를 막 들려는 순간 내가 “받지 마!”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여보세요”를 하고 있었다. 전화를 건 상대방은 그 여성 기자였고, 예민한 감각으로 모든 상황을 감지한 듯했다. 이튿날 아침 <조선일보>에 ‘전교조, 정부의 복직방침 수용하기로’라는 기사가 나와버렸다. 참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고, <조선일보>가 우리의 교육개혁 노력을 제대로 다루지 않은 점에서는 무척 유감이었지만 그 여성 기자의 집요한 기자정신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0월15일 오후 2시, ‘전교조 해직교사 복직과 관련한 특별담화문’ 발표를 위한 기자회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위원장실에 혼자 앉아 있었고, 기자들이 본부 사무실 3층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나는 나갈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눈물이 많지 않은 편인데 그날은 어찌나 눈물이 흐르는지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수없이 많은 지난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복합적인 감정이 함께 밀려왔던 것이다.
우리 젊은 해직동지들은 그 어려운 조건에서 호주머니에 토큰 몇 개 넣고 다니면서도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다. 토론회나 지방 출장 때도 한 지역이면 토큰 몇 개로, 여러 지역이라도 겨우 차비 정도만 들고 흔쾌히 다녔다. 그런 젊은 후배들을 보면서 나는 ‘인간이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구나. 꿈을 먹고도 저렇게 열심히 뛸 수가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배우면서 위원장 자리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 선생님들에게 미흡한 복직 방침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무척 마음 아팠다.
그러나 복직 문제를 더 미룰 수는 없었다. 해직기간 동안 8명(배주영·신용길·이광웅·정영부·정영상·임희진·박미경·길옥화 등)의 해직교사가 유명을 달리했다. 사인은 암·심부전증·심장마비 등이었다. 특히 길옥화 선생님은 9월26일 투신자살했다. “정갈하면서도 힘찬 글씨로 신양중 분회 결성 취지문을 썼던 그 손으로 차마 탈퇴각서를 쓰고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가깝게 지낸 동지들의 말이었다. 참교육 실현을 위해 해직을 무릅쓰고 열심히 뛰어다녔던 선생님들이 죽어가는 모습은 견디기 힘들었다. 해직 충격과 스트레스, 계속되는 해직생활로 가족들에게 또는 부모님께 미안했던 마음의 고통이 ‘암’을 만들어 선생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젊은 동지들의 주검을 앞에 두고 위원장으로서 장례위원장을 맡아야 했던 때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던지. 또 병들어 고생하고 있는 동지들을 보는 심정도 고통스러웠다. 더는 장례위원장을 맡고 싶지 않았다.
위원장으로서, 비록 두 줄일망정 ‘탈퇴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복직신청서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아무리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던 때라고 하지만 차마 하기가 힘들었다. 여러 차례 눈물을 닦고 일어나려 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예정된 시간이 다 될 무렵 고진형·이수호 부위원장이 위원장실로 들어왔다. 내 모습을 보더니 5분 넘게 말 한마디 못하고 서 있다가 나갔다. 아마 ‘기다려 달라’고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했을 것이다. 가까스로 눈물을 추스르고 기자회견장에 들어간 때는 2시30분이 훨씬 넘어서였다. 회견문을 발표하고 기자들의 질의응답에 차분하게 응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했던 서울지부 해직교사 한 분이 회견이 끝난 뒤 “위원장님, 탈퇴 조건으로는 복직을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순간 기가 막혔다. “선생님 마음 내키는 대로 해야 되겠지만 이것은 조직의 명이에요. 우리가 한두번 생각하고 결정한 것 아니잖아요. 수없이 논의하고 수많은 원로들께도 여쭤보면서 절차 밟아 정한 방침이잖아요. 그러니 복직신청서 내세요.” 그 선생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내내 서 있었다. 그때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쓰라리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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